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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박범신 "우리가 믿는 사랑의 80~90%는 폭력"

 

일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여전히 '불온하고 위험한' 현역작가로 활동 중인 박범신(68) 씨가 새로운 사랑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 장편소설 '소소한 풍경'(자음과모음 펴냄)이다.

신작 장편은 소녀의 싱그러움에 매혹 당한 70세 시인 이적요의 사랑과 욕망, 질투를 그린 그의 대표작 '은교'와 마찬가지로 파격적이면서도 불가능한 사랑을 그렸다.

소설에는 두 여자와 한 남자가 등장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파르게 넘어온 이들은 가상의 도시 소소(昭昭)로 흘러들어오고 셋은 우연히 같은 집에서 동거하게 된다.

저마다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임을 알게 된 이들 사이에는 자연스레 사랑의 감정이 싹튼다.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삼각관계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두 여자는 한 남자를 독차지하기 위해 서로 질투하거나 서로 배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 사람은 서로 보듬어 안고 한 덩어리가 돼 사랑을 나눈다. 소설에는 이들의 이러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삼각형의 꼭짓점은 뾰족하지 않고 둥글어져 원이 된다. 삼각형을 원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소소한 풍경'의 사랑은 불가능한 사랑이다."(복도훈 문학평론가)

책을 내고 7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기자들과 만난 박씨는 "예전에는 '사랑은 유일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라고 믿었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그것이 부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유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또 다른 억압이 아닌가 싶었다"고 설명했다.

"젊을 때는 사랑을 갖는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소설에도 드러나 있지만 사랑은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누구를 가지려고 하면 할수록 고통에 빠진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어요. 우리가 믿는 사랑의 80~90%는 폭력이라고 느낍니다."

작가에게 사랑이란 소유한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소설 속에서 '섹스'라는 소유와 욕망의 용어 대신 '덩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그래서다.

작가에게 사랑의 완성은 한 덩어리가 되는 것이다. 남녀라는 성별의 구분조차도 사라지고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런 갈망은 우리의 DNA 속에 영원히 있는 것이죠. 가장 완전해지는 순간에 대한 욕망 같은 거죠.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룰 수 없는 꿈 같아요. 어떻게 해도 완전해질 수 없는 사랑의 불완전성에 대한 갈망을 쓴 소설입니다."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여서일까? 작가는 소설의 인과관계를 명확히 설정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흐름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고 그 틈새를 메우는 것은 작가의 검푸른 무의식이다.

그는 "우리를 강력하게 장악하는 생의 심연에서 포르르 솟아올라온 작은 물방울들을 쓰려고 노력했다"면서 "밤마다 어둠 속에 홀로 누워 찬 방바닥에 귀를 밀착시키고 어둡고 먼 지하에서 울려오는 정적이 하는 말들을 들으려고 애썼다"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내가 지금까지 배워온 소설적인 구조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고 노력했다"면서 "서사의 감수성이 아니라 시적인 감수성으로 읽어달라"고 독자들에게 당부했다.

작가는 소설 집필을 마치고 나서 제일 먼저 떠오른 말이 '비밀'이라는 단어였다고 소개했다. 생에 존재하는 어떤 미지의 공간을 소설 속에서 끄집어내 독자들이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형상화하는 것에 요즘 부쩍 매력을 느낀다고 했다.

"존경받는 작가가 될 것이냐, 대중들로부터 사랑받는 작가가 될 것이냐, 제 대답은 사랑 없는 존경보다 존경 없는 사랑을 받고 싶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섹시하게 늙어가고 싶죠. 노인 작가가 쓸법한 거대담론보다 그래서 이런 위험한 불온한 소설을 쓴 겁니다. 나는 예술가고 예술가로 죽고 싶은 게 제 꿈입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일상은 일흔답게 점잖게 가고 소설은 위험하게 가자"고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슬픔은 몸속의 가시가 되고 분노는 병이 되는 것 같다"면서 "소식을 접하고 화가 오랫동안 가라앉지 않아서 앓아누웠다. 심지어 소설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정서적 상처를 받았다"며 희생자들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