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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을 떠나고 싶어 떠나는 게 아니다 '전세 난민 속출'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대학 학부생인 K 씨 (25)는 지난 1년간의 휴학을 마치고 복학을 하려고 한다. 지금 부모님과 사는 집이 충남 천안에 있기 때문에  휴학 이전에도 학교 근처에서 전세방을 구해 학교 근처에서 생활했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서울의 연립?다세대 전세 주택 시세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어쩔 수 없이 K 씨는 통학에 총 3시간이 소요되는 경기도 하남시에 집을 얻었다.

K 씨의 이주 자금은 약 8천만 원이다. 이것도 부모님의 지원과 소액이 대출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K씨가 알아보았던 고덕동의 평균 전세보증금은 1억2천만 원으로 다세대 주택 전세를 얻기도 힘들었다. 인근 다세대주택은 49㎡ 규모도 전세 시세가 1억3천만∼1억5천만 원에 달한다. K씨가 보유한 돈에서 최소 5천만 원 이상이 더 필요한 것이다.

K 씨는 "아파트도 아닌 다세대이고, 평수도 더 작은데 전세금이 부족하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라며 " 서울 외곽이라 가격이 조금 저렴할 것을 예상하고 고덕동을 알아봤는데, 별수 없이 경기권으로 가게 되었다. 학교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한숨지었다.

3월이 다가오면서 새 학기를 맞는 학생들, 직장을 옮기는 회사원, 신혼부부 등 이사 수요가 늘고있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전셋값에 적당한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학교와 직장 다수가 위치한 서울에 집을 얻고 싶어 하지만 결국 수도권으로 떠밀려가게 된다. 전문가들은 이에 대해 '엑소더스(exodus·탈출)' 현상이 확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이 계속해서 오르고 물건마저 부족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상대적으로 값이 싼 연립·다세대 주택과 서울 외곽, 수도권 등지로 내몰리는 '전세 난민'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경기권 전세값도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서울에서 떠밀린 전세 난민의 수요로 인해 경기지역 전세가율 역시 70% 가까이 치솟고 있어 세입자들의 고통은 커지고만 있다.

◇ 상황은 악화일로… 월세전환에 재건축 이주까지

전세난의 원인은 여러 악재가 혼재된 결과로 볼 수 있다. 전통적으로 전세를 선호하는 세입자들과는 달리, 건물주 사이에선 저금리 기조하에 월세전환을 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어 전세물건이 급감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사철이 겹치며 수요는 더욱 늘었고, 여기에 최근 강남권 재건축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재건축 이주 수요가 또 다른 변수로 가세했다. 수요가 많은데 공급이 적으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은 당연하다. 

서울 송파구 잠실동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전세 만기가 되면 상당수 집주인들은 전셋값 인상분을 월세로 받길 원하지만 세입자들은 월세 부담에 난색을 표한다"며 "그나마도 재계약이 많고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보니 수요공급 원칙에 의해 전셋값이 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덕동 양지공인 이덕원 대표는 "이 동네에서 전세를 못구한 세입자들이 울며겨자먹기로 남양주 덕소·하남 등으로 밀려나가고 있다"며 "재건축 이주가 가을 이사철까지 진행될 예정이어서 이 지역 전세난이 1년 내내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서초구 잠원·반포동 일대도 사정은 비슷하다. 현재 잠원동 한양, 한신 5차 등의 아파트 이주가 진행되면서 인근 아파트 전세물건이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 서울에서 경기로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강남에서 강북으로 거주지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 연립주택 전세 상승률이 아파트보다 높다. 전세가율도 사상 최고

이처럼 서울 아파트의 전세난이 심화되면서 대체상품인 연립·다세대주택 전셋값도 가파르게 오르고 잇다.

국민은행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지역 아파트 전셋값은 0.41% 오른 반면 연립주택은 0.43% 상승해 아파트 상승률을 추월했다.

한강 이남지역은 연립(0.29%)에 비해 아파트(0.50%)의 상승폭이 컸지만 서민층이 많은 한강 이북지역은 연립주택(0.57%)의 오름폭이 아파트(0.27%)의 2배가 넘었다.

연립주택의 전셋값이 오르면서 지난달 서울지역 연립주택의 매매가 대비 전세가 비율도 63.9%로 2011년 조사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파트 전세가율도 매달 최고치를 경신한지 오래다.

지난달 전국의 아파트 전세가율이 70.2%로 두달 연속 70%를 넘어선 가운데 서울 전세가율은 66.1%로 1998년 조사 이래 가장 높았다.

특히 경기도 아파트의 전세가율은 69.5%로 전월(69.1%)보다 0.4%포인트 높아지면서 70%에 육박하고 있다.

국민은행 박원갑 수석부동산연구위원은 "서울 전세난이 수도권으로 확산하면서 수도권의 전셋값도 계속해서 상승하는 추세"라며 "설 이후 봄 이사철이 본격화될 경우 전세난이 더욱 심화될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

◇ 정부 재건축 이주 시기조정 '유명무실'...적극 대처해야

최근의 전세난엔 정책적인 구멍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부는 재건축 이주로 전월세 가격이 들썩거리는 것을 막기 위해 지난해 10·30 전월세 대책에서 재건축 이주시기를 적극적으로 분산하기로 했었다. 종전까지는 해당 재건축 이주 아파트의 단지가 2천가구가 넘으면 이주 시기 심의를 받아야 했지만 앞으로는 동 단위로 확대해 해당 동에서 이주를 하는 재건축 단지의 가구수 합계가 2천가구 이상이면 지자체의 심의를 거쳐 1년 이내에서 이주시기를 조율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강동구에서 이주를 계획중인 재건축 단지는 이미 서울시가 관련 조례를 개정하기 전에 이주 승인을 내줬었다. 2천가구 미만이고 법정동이 다르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중개업자들은 이들 단지가 한꺼번에 이주를 했기 때문에 이 지역의 전세난이 가중된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국민은행 조사에 따르면 지난달 강동구의 아파트 전셋값은 0.88% 올라 서울지역 전체를 통틀어 최고치를 기록했다. 서울 평균 상승률(0.41%)과 비교해서도 2배가 넘는 수치다. 

박원갑 전문위원은 "5천가구에 육박하는 단지가 한꺼번에 이주하면서 가뜩이나 높은 전세가격이 더 치솟고 있다"며 "주민들 민원 때문에 이주시기 조정이 생각만큼 쉽지 않겠지만, 인근 지역의 파급효과를 고려해 정부와 지자체가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