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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곤 경기도 교육감 홍준표 경남도지사 공개서한 전문

존경하는 홍준표 지사님께

전 경기도교육감 김상곤입니다.

얼마 전 TV에서 경남 양산에 가득 피어난 매화꽃을 보았습니다. 남녘에는 봄기운이 완연하겠지요? 제가 살고 있는 수도권에는 3월에 한파 특보가 내려지는 등 동장군의 마지막 발악과 위세가 사뭇 거셌습니다. 그러나 봄은 어김없이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렇게 성큼 다가왔습니다.

선별적 무료급식은 제도적 폭력에 가까워

경남도내 무상급식 예산 643억 원을 전액 삭감하여 서민교육지원사업에 쓰겠다는 지사님의 계획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우려스러운 마음에 몇 말씀 드리려 합니다. 비록 현직을 떠나 있지만, 무상급식을 포함한 한국사회의 보편적 복지의 필요성을 앞서 주장한 사람으로서 책무성을 느껴 드리는 말씀이오니 크게 나무라지는 말아주십시오.

잘 아시는 것처럼, 2009년에 제가 교육감에 당선된 이후 경기도에서 추진한 보편적 방식의 무상급식 정책은 교육과 복지의 형식과 내용을 둘러싼 첨예한 논란으로 확대되었고, 몇 번의 선거과정을 거치면서 이제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상징적 복지정책이 되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국민적 공감과 합의를 이뤄 온 사안이 지사님 개인의 이해하기 어려운 신념과 정치적 행보 때문에 또 다시 논쟁과 대립을 반복하는 것은 소모적일 뿐더러 옳은 일이 아닙니다. 이는 시대의 물줄기를 거스르는 역사적 퇴행에 가까운 일이므로 '국민의 뜻'에 따라 원상회복해야 마땅합니다.

보편적 방식의 무상급식은 제가 처음으로 도입한 정책이 아닙니다. 이미 거창을 비롯한 경남의 기초지자체와 성남·과천 등 일부 지자체에서 2007년부터 도입·추진한 정책을 제가 경기도 전역의 광역자치 차원으로 확대 추진한 정책입니다.

초기에 무상급식을 추진한 당시 기초자치단체장의 대부분은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분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정책의 뿌리는 지사님이 말씀하셨다는 '얼치기 좌파들의 국민현혹공약'이 아니며 진보·보수라는 진영 논리나 여야로 나뉘어서 싸울 사안도 아닙니다.

교육감에 당선된 이후, 무상급식 등의 보편적 복지 정책이야말로 학교에서 아이들이 느끼는 불평등과 심리적 차별을 막을 뿐 아니라, 양극화가 빚어낸 사회·경제적 불평등에 따른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사회통합의 과정이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차별 중에서 가장 서러운 것이 '밥'의 차별입니다 더욱이 그 대상이 자라나는 아이들이라면 이는 문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무상급식을 받기 위해 얼마나 못사는지를 입증해야 하는 부모와 아이의 마음, 급식비를 못내는 아이들에게 매달 독촉장을 내밀어야 하는 선생님, 그것을 받자마자 책상 서랍 속으로 구겨넣는다는 초등학생들, 급식비를 못내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하는 수없이 더 싼 식재료와 식단으로 급식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동네의 학교 모습은 급식이 단순히 한 끼 밥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개인의 자존과 사회적 공존의 방식, 즉 인권과 복지의 문제임을 웅변합니다.

사회 전체가 힘을 모아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함께 잘 키우겠다는 공공의 약속을 우리는 '의무교육'이라고 부릅니다. 선별적 무료급식은 우리 사회에서 성적이나 외모에 대한 비교보다 훨씬 더 굴욕감을 주는 원색적인 비교표이고 이것은 제도적 폭력에 가깝습니다.

급식예산으로 EBS 수강권 주면 개천에서 용 날까요?

저는 그 동안 홍 지사님에 대한 신뢰를 크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무산되어 시장직에서 물러나던 2011년 당시 지사님께서는 한나라당 대표이셨습니다. 이로 시작된 후폭풍으로 당대표에 물러나신 이후 총선에서 낙선하는 정치적 시련까지 겪으셨지요.

보통사람이면 무상급식 트라우마가 생길 법한 상황입니다만, 도지사에 출마하시면서 '국민의 뜻이라면 따르겠다'고 밝히시고, 실제로 당선 이후에도 무상급식을 정상적으로 추진하는 모습을 보면서 큰 정치인은 다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더욱이 2013년 1월 경남도청이 "복지예산은 감축하지 않는다는 도지사의 의중을 반영하여 학교 무상급식 예산에 대하여는 부족분을 추경에 확보하여 정상 추진한다"고 발표하더군요.

오세훈 전 서울시장님을 비롯한 정치인의 잘못된 인식이 어떠한 결과를 빚어내는지를 보시면서 국민의 뜻이 무엇인지, 시대의 흐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그에 걸맞은 정치적 행보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그 교훈을 지혜롭게 취하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이런 상황을 만나니 더욱 혼란스럽습니다.

무엇일까요? 한 때는 '국민의 뜻'으로 받아들인 정책이, 전 국민이 보는 중앙일간지에 '무차별적인 부자무상급식'이라는 선명한 적의를 담은 표현을 동원하여 큼지막한 광고를 게재할 만큼 분노하는 정책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새해부터는 천천히 대권준비를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힌 지사님의 연초 말씀 때문에, 차기 대권을 위한 정치적 행보이자 이슈를 선점하려는 노이즈마케팅의 일환으로 무상급식 정책을 활용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일부의 견해가 정말 맞는 것인지 참으로 걱정스럽습니다.

지사님께서 추진하시는 '개천에서 용이 날수 있는 사회'를 위해 서민자녀 가정에게 연간 50만원 내외를 지원하는 서민교육지원사업이 정말 무상급식의 의미를 넘어서는 중요한 정책일까 궁금해서 살펴보았습니다. 핵심은 경남도내 전체학생 41만 6천명의 24% 정도에 해당하는 서민자녀들에게 1인당 50만원내외의 범위에서 EBS 교재구입과 온라인 수강권, 명사특강 지원 등을 하겠다는 것이더군요.

무상급식을 중단한 예산으로 EBS 교재와 수강권을 줄테니 소득, 재산, 금융재산 등 서민자녀임을 입증하는 서류를 들고 주소지 읍면사무소 및 동주민센터에 가서 신청하라는 것입니다. 저소득층 아이들 일부는 무료급식 대상자와 '서민교육지원사업 대상자' 모두를 입증해야 하겠군요.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제공되던 밥상을 빼앗은 예산으로 서민자녀임을 증명한 자녀들에게 EBS 수강권을 주면, 그러면 정말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사회'가 만들어질까요?

더욱 놀라운 것은, 서민교육사업지원 조례안이 도의회에서 심의도 통과도 되기 전에 일간지 광고와 기초지자체 홈페이지 등을 통해 신청부터 받는 일이었습니다. 의회를 도지사의 거수기로 여기지 않는 한 나올 수 없는, 의회민주주의의 기본절차조차 무시하는 이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요?

결국 더 큰 정치적 입지를 위해 국민의 뜻이나 경남도지사 자리 정도는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여기시는 것은 아니신지 불안한 마음 감추기 어렵습니다.

결론을 정해놓고 이미 정해진 '나만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의회 절차는 물론 궤변과 말 바꾸기조차 아무렇지도 않다면 우리가 혐오하는 구시대의 낡은 정치와 무엇이 다를까요?

서민교육지원사업 조례 통과만은 안 됩니다

존경하는 도지사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무상급식은 인권입니다. 헌법 22조와 31조는 모든 사람이 사회보장을 받을 권리와 의무교육 무상 원칙을 천명하고 있고,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의 경제사회적 권리를 인권이라고 칭했습니다. 인권과 교육권이 올곧게 지켜지는 사회가 공정사회이고 공생발전의 기본입니다.

일부에서 호도하는 것처럼 한국은 결코 복지과잉 국가가 아닙니다. 단순 비교의 한계는 있습니다만 올해 OECD 발표에서도 지난해 한국의 GDP 대비 사회복지지출 비율은 10.4%로 회원국 평균 21.6%의 절반에 불과한 꼴찌였습니다.

예산 부족으로 늘어나는 복지 지출을 감당하기 버거운 현실은 있지만, 이는 복지증세 등의 적극적이고 근본적인 해법과, '무엇을 위해 어디에' 쓸 것이냐는 비전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정공법으로 해결해 나가야지 무상급식 예산을 EBS 수강권 등으로 돌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사님 말씀대로 학교는 공부하는 곳 맞습니다. 그러나 공부를 잘 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와야 할 많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이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세계에서 가장 불행에 익숙한 우리 아이들입니다. 세계 최고의 학업 스트레스 속에서 주관적 삶의 만족도를 비롯하여 행복지수, 사회에 대한 신뢰도 등은 비교국가 중에서 만년 꼴찌입니다. 그나마 평화롭게 나누던 아이들의 밥상조차 어느 날 갑자기 정치인 한 사람의 뜻에 따라서 사라져 버린다면 우리 아이들에게 정치와 국가는 어떤 의미로 다가갈까요?

존경하는 지사님께 충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부모와 아이의 마음을 헤아리고 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표정을 조금만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가난과 불평등과 소외와 학업부담으로 힘들고 지친 아이들에게 자신이, 자신의 부모가 하위 몇 %라는 낙인을 증명하게 하지는 말아주십시오.

경남도민 여러분과 박종훈 교육감님을 비롯한 경남교육가족, 그리고 경남도의회 의원님 여러분께도 감히 부탁드립니다. 도지사님과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서 무상급식이 좌초되지 않도록 힘을 모아 주십시오. 오로지 무상급식을 내치기 위해 급조된 것이 분명한 서민교육지원사업 조례 통과를 막아주십시오. 혼란스러운 시절에는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이 더 크게 세력을 뻗으며 번져가는 수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경남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미래 비전과 희망에 관한 매우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존경하는 도지사님!

18일에 문재인 야당 대표님과 만나신다고 들었습니다. 큰 정치를 하시는 분들께서 만나 봄꽃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실 것을 간절히 기대하겠습니다. 이 공개서한에 지사님을 불편하게 하는 외람됨이 있었다면 이는 제 표현의 미숙함이 낳은 불찰 탓이오니 널리 양해하여 주십시오.

지사님의 건강과 건승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3월 16일
전 경기도교육감 김 상 곤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