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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벌'이 '정상'을 만든다. 유승준 효시(梟示)하여 일벌백계하듯 군내부 개혁하기를...

한국의 가수였던 유승준, 지금은 스티브 유
한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지만, 군대를 피하기 위해 한국 국적을 포기한 스티브 유 씨

군의무를 피해 도망간 유승준의 연애인 생명을 끊어버리고, 대중에게 효시한 국방부.

바른생활 사나이, 아름다운 청년, 90년대 최고의 댄스가수...라고 유승준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없다. '토토가' 열풍이 불며 90년대 인기 가수를 재발굴하는 분위기가 조성됐지만 아무도 무대에 선 유승준을 다시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음원 시장 주 구매층인 10대~20대 태반은 유승준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저 오래전 군대 가기 싫어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에 간 사람이라고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유승준 사건 전까지만 해도 연예인의 군 입대는 곧 생명이 끝나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졌다. 연예인 병역비리는 만성적이었고, 국민들도 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로 생각해 묵인했다. 하지만 유승준 사건을 통해 연예인 병역비리가 공론화되자, 여론의 뭇매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군 입대를 하는 풍조가 조성됐다. 이 사건 이후 박수홍, 문희준, 이휘재, 차인표 등이 군소리 없이 군입대했고, 언론도 이들을 자랑스러운 국민으로 집중해서 보도하기 시작했다. 문희준은 군 만기 전역을 하며 인기를 되찾기도 했다.

MC몽은 새 음반을 발표했음에도 '발치몽'이란 조롱만 얻었을 뿐 별 성과를 못 얻었고, 인기에 민감한 아이돌 출신 연예인들은 이제 자발적으로 군대에 입대한다. 만약 유승준의 병역의무 거부를 묵인했다면 아직도 수많은 연예인이 군 입대를 피하는 비정상적 관행이 지속되었을 거라며, 유승준을 단죄한 덕에 국방의 기강이 살았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다. 유승준의 입국을 금지한 병무청의 조치가 사회 정상화에 큰 효과를 발휘한 셈이다.

 

김영삼 집권 후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을 선고받았으나 임기 말 특별사면 받았다.
김영삼 집권 후 전두환은 사형, 노태우는 징역 22년을 선고받았으나 임기 말 특별사면 받았다.

반면, 군 내부자의 단호한 처벌은 이루어지기 힘들다.

하지만 군대는 그 특수성으로 인해 쇄신이 힘든 면이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하나회 숙청을 통해 군을 변혁시키려고 했다. 그는 하나회는 군 내 불법 사조직이었던 데다, 하나회 소속 군인들의 능력도 의심스럽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들이 국가 요직을 독점하는게 정상적이지 않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초급장교 시기부터 육군본부, 중앙정보부, 수경사, 대통령 경호실, 보안사 등 권력과 관계된 요직만 거친 탓에 전투 부대 근무 경험은 전무한 거나 다름없었다. 노태우의 경우엔 소령 진급에 꼭 필요한 중대장 경험조차 없었고, 전두환은 베트남에 지휘관으로 파병했으나 지휘능력이 부족하다는 악평을 들었다.

김영삼은 군내 부패를 뿌리뽑고자 취임 11일 만에 "군 내 사조직을 해체하라"며 하나회 군과 정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하나회 멤버를 싹 갈아버렸다. 육군참모총장과 기무사령관, 특전시령관, 수방사령관 등등 수많은 별이 떨어졌다. 이들은 진급에서 배제되었을 뿐 아니라 강제 전역까지 당했다. 덕분에 박정희 정권 때부터 쌓여오면 군 부패의 적폐를 극복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들은 군을 떠났을 뿐, 여전히 사회 지도층으로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예편 후 기업 임원으로 자리 잡은 사람도 있고, 국회에 지출한 사람도 상당수다. 요직에 있었던 탓에 인적 네트워크는 사라지지 않았고, 정권의 처벌은 이들을 진짜 죄인으로 만들지 못 했다. 사형을 선고받았던 전두환마저 특별사면을 받고 전 대통령으로서 예우 받고 있다.

 

엄정한 벌을 통해 군 기강을 세운 장수, 이순신(좌), 손자(중), 제갈양(우)
엄정한 벌을 통해 군 기강을 세운 장수, 이순신(좌), 손자(중), 제갈양(우)

비정상 군대를 필벌 통해 정상화한 사례, 이순신?손자?제갈양

군대는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자유롭지도, 민주적이지도 않을 것을 요구받는 집단이다. 전쟁과 전투를 전문으로 하고 국방이란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한 조직이기에. 엄정한 기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옛 전사(戰史)에선 잔혹할 정도의 필벌을 한 사례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난중일기에서 이순신이 부하를 처벌한 기록은 처형 28회, 곤장 44대, 처벌 36회, 구속 15회에 달한다. 이순신이 지휘권을 잡기 전까지 조선 수군의 사기는 바닥을 기었다. 조선의 군세는 일본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이었고, 전쟁에서 승리할 가망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히 군 기강은 해이해졌고 병졸은 도망하기 바빠 싸우기도 전에 군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이순신이 가차 없이 탈영병의 목을 날리니 군은 처벌에 두려움을 가져 자연히 기강이 잡히기 시작했다.

손자병법의 저자 손자는 오왕 합려로부터 "궁녀를 정예군으로 만들어라."는 시험을 받았다. 손자는 합려가 가장 아끼는 궁녀 둘을 대장으로 세워 제식훈련을 시켰으나, 궁녀들은 이를 장난으로 여겨 따르지 않았다. 이에 손무는 대장으로 세운 두 궁녀를 처형해 본보기로 삼았고, 이에 겁에 질린 궁녀들은 정예군 못지않게 일사분란히 움직였다.

 제갈량은 가정 전투에서 애제자이자 부하 장수인 마속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하지만 마속은 제갈량의 충고를 무시하고 공을 서두르다 전투에서 패했고, 제갈량은 마속의 처벌해야 할 입장에 섰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란 말이 있듯이 전투에서 패배하는 건 장수의 목숨을 내놓을 정도로 큰 잘못이 아니었다. 동시대에 조조가 패배한 하후돈을 관대히 용서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건국한지 얼마 안 된 촉나라는 유비 세력과 토착세력 간 갈등이 있었고, 관우, 장비, 조운 등 유비 세력이 공신으로 임명되자 토착세력은 전공에 차별이 있다는 이유로 반발할 움직임을 보였다. 제갈량은 유비 세력인 마속을 엄정히 처벌해 군법 기강을 보일 필요가 있었고 결국 눈물을 흘리며 마속의 목을 베었다.

이번 예비군 총기 난사 사건 역시 책임소재를 명확히 밝혀 엄격히 처벌해야 한다. 해당 부대 지휘관을 보직해임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보직을 옮겨 군 생활을 계속한다면 징계를 겁낼 군인은 아무도 없을 거다. 사고에 둔감하고 재발 방지에 노력하지 않는 군의 현실을 극복하려면 필벌을 통해 군 기강을 세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