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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주부, 백수 등 무직자.. 은행 계좌 만들기 어려워졌다

학생, 주부, 무직자... 은행 계좌 만들기 힘들어졌다.

개인 자금 관리용 통장을 개설하러 은행에 방문한 A씨. 대기번호표를 뽑고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한 창구에서 노인 "아니, 내가 내 통장 만든다는데 왜 안된다는거요?"라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쳐다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은행 한편에 틀어놓은 TV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노인의 불평 때문인지 대기시간이 꽤 길었다. 대기인이 많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30분을 넘게 기다려 약간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시내까지 나온 김에 통장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참고 기다렸는데, 막상 순번이 되어 창구로 가니 은행원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젠 신분증만으로 통장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지침에 따라 앞으로 개인 용도 신규 통장 개설은 급여 이체 통장이나 모임 통장, 공과금 납부 통장 등 명확한 '이유'가 있어야 가능해졌다. 재직증명서, 근로소득원천징수서, 급여명세표 등 신분증 외 증빙서류도 필요하다. 모임 계좌 개설시엔 구성원 명부와 회칙 등 모임 입증 서류까지 제출해야 하며, 회사나 집이 지점 근처가 아니면 통장 개설이 불가능한 경우도 있다. 결국 A씨는 한 시간을 넘게 허비하고 통장도 만들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신한은행이 요구하는 금융 거래 목적 증빙서류
신한은행이 요구하는 금융 거래 목적 증빙서류

계좌 개설이 요건이 강화된 건 대포통장 등 금융사기 예방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A씨가 방문한 은행뿐 아니라 신한, 우리, 국민, 하나은행 등 은행 다수가 계좌 개설 요건을 강화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건 증빙 내역이 없는 학생이나 주부, 무직자 등이다. 직장이 없는 이들이 신한, 우리, 하나 은행에 방문했다가 계좌 개설을 거절당했다는 수기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은행 고객들은 은행의 조치에 분노했다. 은행을 방문한 한 고객은 "내가 이 은행에 8년째 거래 중인데 배신감을 느낀다. 당장 예금과 적금을 모두 빼버리고 싶다."라고 열변을 토했다. 은행이 모든 금융소비자를 '잠재적 범죄자'취급한다는 점에서  여론도 적지 않았다. 조연행 금융소비자연맹 대표는 "대포통장을 만드는 경우는 극소수인데 관련 규제는 과도하다"며 "일부 은행은 통장 발급을 미끼로 급여·관리비 이체 등을 유도하거나 심지어 적금 가입을 권유하는 등 마케팅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금감원은 나날이 진화하는 금융사기 피해를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라는 입장이다. 그동안 한국이 너무 쉽게 입출금 통장을 만들었던 것이 문제이며, 미국이나 일본 등에선 계좌 개설 시 신원확인은 물론이며 거주지 증명서와 인터뷰까지 요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객들은 "이건 빈대 하나 잡자고 초가삼간 다 태우는 행위다. 금융자본주의 근간이 무너질수도 있다."라며 쉽게 수긍하지 못하는 분위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