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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찌아찌아족 한글 쓰기 프로젝트가 2탄이 나왔다

민족주의적 자부심이 만들어낸 사실 왜곡

'영어는 우리말입니다.'라는 책이 있다. 1997년에 출판돼 온라인에서 7,500원에 팔리고 있는 이 책은 상당히 당혹스러운 내용을 담고 있다. 세계 모든 나라의 언어 생성이 우리말에 영향을 받았으며 특히 영어는 우리말을 토대로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인데, 영어 단어와 한국어를 억지로 대응시켜 기원을 증명하려 하지만 근거가 없는데다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황된 내용이라 유머를 목적으로 만든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가령 이 책은 Acknowlede란 단어를 발음이 비슷한 '아쿠 놀랬지!'가 어원이라고 소개하는데, 과거엔 상대방이 놀랄 정도로 악을 써가며 요구를 해야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관습이 있어 '인정하다'라는 뜻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은가?

몇 가지 예를 더 들어보겠다. 사생아를 뜻하는 'Bastard'란 단어의 어원은 '밭터에서 온 아들.'인데, 어느 날 밭 근처를 지나가던 여인이 밭에서 일하던 아저씨와 우연히 눈이 맞아 그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지만, 혼인도 하지 않은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라 소문이 금방 퍼져 아이가 '후레 자식'과 같은 욕을 먹으며 자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해석이라고 볼 수 있겠다.   

이런 괴상한 책이 집필된 배경은 무엇일까? 저자 강상순은 머리글에서 "우리(한민족)에게 감춰져 있던 놀라운 사실을 민족적 에너지로 묶어 인류 평화에 기여하고 우리들의 자긍심을 드높여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마치 과거 박씨전이나 환단고기에서처럼 민족우월주의에 빠져 현실을 왜곡하고 만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훈민정음학회가 펴냈던 찌아찌아어 한글 교과서
훈민정음학회가 펴냈던 찌아찌아어 한글 교과서

한국인 가슴 뜨겁게 만들었던 찌아찌어족 한글 도입... 부끄러운 역사가 되다

그러나 환단고기가 그럴싸한 내용으로 역사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것처럼, 왜곡된 사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지는 일도 발생한다. 한때 한국인의 가슴을 자부심으로 뿌듯하게 채웠던 '찌아찌아어 한글 도입'사건이 좋은 예다.

찌아찌아족이 살고 있는 인도네시아의 바우바우시는 2008년 7월 훈민정음학회와 '한글교사 양성에 관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2009년엔 '문화예술 교류와 협력에 관한 의향서(LOI)'를 체결하는 등 친(親) 한국적 행보를 보였다.

문자가 없어 로마자를 사용하는 찌아찌아어에 한글을 도입하겠다는 계획도 이 시기에 나왔다. 훈민정음학회는 "사라져가는 언어와 문화를 실제로 살려낸다면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 입증할 수 있게 될 거다."라며 김칫국을 마셨고, 언론에서도 "민족 문자에 불과했던 한글이 세계에 전파되는 첫 사례."라며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찌아찌아족이 관심 있는 것은 한글이 아니라 협정을 통해 얻게 되는 지원금이었다. 훈민정음학회엔 한국 문화관을 짓는 등의 경제적 원조를, 서울시에는 문화센터를 짓는 등 도시개발 사업을 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산 문제 등으로 계획이 백지화되자 찌아찌아족은 2011년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당시 한글 교사 양성은 완전히 중단돼 초등학교 3곳에서 193명에게만 한글 교과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한글의 일상 문자 도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이 엇갈린 채 의욕만 앞섰던 한글 세계화 운동의 씁쓸한 결말이었다.

인도네시아는 수많은 섬이 모여 만들어진 국가인 탓에 지방어가 약 400개에서 700개로 추산되는 복잡한 언어 생태계를 가지고 있다. 이때문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지방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을 경계하며, 헌법에서부터 공용어인 인도네시아어의 지위를 못박는다. 사회문화적 특성상 언어가 민족통일과 국가통합을 기능까지 수행하는 것이다. 외국 문자인 한글을 지방 도시가 공용어로 지정하는 건 처음부터 가능성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세계 많은 국가에서 영어와 불어, 스페인어 등을 공용어로 지정하고 배우는 건 그 언어가 우수하기 때문이 아니라, 종주국이 세계 패권을 좌우했던 강대국이었고, 사용하는 사람과 지역 수가 많기 때문이다. 만국 공용어를 목표로 만들어진 인공어 에스페란토가 쓰고 배우기 쉽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사장된 것을 생각하면, 한글이 우수하다는 이유로 세계 진출에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것은, 섣부른데다 오만하기까지 한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이마라 부족
아이마라 부족

한글 도입은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우월감에 젖으면 안된다

그런데 찌아찌아어 2탄이 추진되고 있다 한다. 서울대 아마리아어 연구단이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남아메리카 토착 부족을 위해 실생할에서 한글 표기법을 활용할 수 있도록 컴퓨터, 모바일 기기용 한글 입력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약 300만 명으로 추정되는 아이마라족은 볼리비아, 페루, 칠레 등지에 살고 있다. 특히 볼리비아에서는 케추아족 다음으로 많은 부족이며 현재 볼리비아 대통령이 이 부족 출신이다. 이들 부족 고유어인 아이마라어는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어 스페인어를 빌려 표기하고 있다.

서울대 권재일 언어학과 교수가 이끄는 연구단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2012년 아이마라어 조사·연구 및 한글표기법 개발을 시작해 3년여만인 지난 8월 해당 언어에 맞는 한글 자·모음을 모두 완성했다고 8일 밝혔다. 지난 2월엔 볼리비아 산안드레스국립대에서 학술회의를 열고 한글 표기법을 발표해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찌아찌아족 선례를 생각했는지 한글 표기법의 무리한 보급은 현지인의 거부감을 살 수 있다는 우려를 이유로 홍보 활동은 자제하고 있다.

물론 서울대 연구단의 시도를 훈민정음학회와 무조건 동일시 할 수는 없다. 그동안 세계에서 한국의 위상은 급격히 높아졌고, 한국어 전공 과정을 개설한 해외 대학 수가 700곳에 가까울 정도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많아졌다. 한국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문화와 트렌드를 주도하는 국가가 된 덕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심을 한국어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문자가 없는 민족에 한글을 가르친다 해도, 해당 국가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해야지, 한국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추진하면 안 된다. 문화적 제국주의에 빠져 무리하게 한글 사용을 강요한다면, 창씨 개명과 일본어 사용으로 자국의 우월함을 강조한 일제의 오만과 다를 바 없는 우습고 부끄러운 역사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