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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황장엽 이후 20년 만에 고위급 탈북민 회견

정부서울청사서 통일부 출입기자단과 간담회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 외쳐…"빨리 대한민국 오시라"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 공사의 27일 기자간담회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의 1997년 기자회견 이후 근 20년 만에 열린 고위급 탈북민의 공개 언론접촉이었다.

1997년 4월 한국으로 망명한 황 전 비서는 그해 7월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 청사에서 30여명의 내외신 기자들이 참석한 기자회견을 갖고 망명 동기와 북한의 전쟁의지 및 전쟁준비 상황, 북한의 식량난과 정세 등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지난 7월 탈북해 한국으로 망명한 태 전 공사는 27일 정부서울청사에서 50여명의 통일부 출입기자단과 공개 간담회를 갖고 망명 동기와 북한 김정은 체제의 실상, 향후 자신의 활동계획 등을 밝혔다.

1997년 황 전 비서 망명 이후로도 북한 고위급의 망명은 있었지만, 20년 가까이 공개 언론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다. 우리 정부는 신변보호 등을 이유로 망명객의 신원을 확인해주는 데도 인색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부가 올해 4월 중국 소재 북한식당 종업원 13명의 집단 탈북을 발표한 것을 계기로 탈북 사건에 대한 정부의 비공개 방침에 변화가 있었다.

이후 태 전 공사의 망명 사실을 발표하는 등 국민이 관심을 가질만한 탈북 인사에 대해서는 언론에 공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태 전 공사는 기자간담회까지 참석하기에 이르렀다.

이날 기자간담회는 태 전 공사가 지난 19일 국회 정보위원회 이철우 위원장, 여야 간사와의 간담회에서 23일부터 신변위협을 감수하더라도 대외 공개활동을 하겠다고 밝힌 것을 계기로 언론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면서 성사됐다.

정부는 개별 언론과 인터뷰를 하는 것보다는 통일부를 출입하는 매체들이 참석하는 기자간담회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태 전 공사도 언론 접촉에 적극적인 의지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보안이 엄격한 정부서울청사를 기자간담회 장소로 선택하고 간담회에 참석하는 기자들의 신청을 미리 받아 비표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신변보호에 신경을 썼다.
태 전 공사는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인터넷 등을 통해 한국의 경제 발전과 민주화 과정을 목격하면서 북한 정권에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지금 김정은 체제 내부로 썩어들어가고 있다"며 북한 체제를 비판했다.

그러면서 "(북한 주민은) 낮에는 김정은 만세를 외치지만 밤에는 집에서 이불을 쓰고 한국영화를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이러한 동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김정은은 북한 주민들과 간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으며 조금만 이상한 모습을 보이면 처형하는 공포통치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의 간부들은 김정은의 미치광이 행태를 보면서 태양에 가까이 가면 타죽고 너무 멀어지면 얼어 죽는다는 생각을 한다"며 "지금과 같은 노예생활이 40년, 50년 지속돼 자기 손자, 증손자 대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북한의 실상을 전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대사관을 탈출한 이후 자식들에게 '오늘 이 순간 내가 너희의 사슬을 끊어주니 자유롭게 살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북한의 핵 위협에 대해서는 "만일 김정은의 손에 핵무기가 쥐어진다면 우리는 영원히 김정은의 핵 인질이 될 것이며 한반도에서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이 한 몸 어디 숨길 데도 없는 우리 자그마한 영토는 잿더미로 변해 구석기 시대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했다.

태 전 공사는 북한 동포를 향해서는 "김정은에 반대해 들고일어날 때"라며 "숨죽이고 살지 말고 김정은을 가볍게 쳐내고 통일된 나라에서 다 같이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자"고 촉구했다.

그는 "여러분의 손에 탈북 면허증이 쥐어져 있는 이 순간을 놓치지 말고 어서 빨리 대한민국으로 오시라"며 탈북을 권유했다.

남한사회에 정착한 탈북민들을 향해서는 "(통일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로부터 통일 선봉 투사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모두발언을 마치고 "통일된 대한민국 만세"라며 두 손을 번쩍 들고 큰소리로 외쳐 눈길을 끌었다.

태 전 공사는 공개적인 대외활동으로 신변위협이 발생할 가능성과 관련해서는 "통일은 개인이나 집단의 희생 없이는 안 된다"며 "이 한몸 통일의 재단에 바쳤는데 김정은의 테러로 죽는다면 그것이 통일의 기폭제가 돼 더 많은 동료가 동참할 것이다. 그러면 통일이 당겨질 것"이라고 결의를 드러냈다.

태 전 공사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정국에 대해서는 "한국의 정치정세를 보면서 시스템이란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느꼈다"며 "한국에서 TV를 보면 당장 나라가 끝날 것 같지만, 사회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가동되고 있다"고 놀라워했다.

이어 "100만명이 하룻밤에 모였다가 흩어질 때 (아무도) 연행되지 않고 모두 청소하고 딱지 뜯고 하는 장면을 보고 대단히 큰 감명을 받았다"며 "현재 국정농단 사태가 가슴 아픈 일이지만 한국이 세계 민주화 과정을 새로운 단계로 선도해 끌고 나가고 있지 않나. 그런 과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태 전 공사는 자신이 영국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받은 월급은 700~800달러 수준에 불과했다는 사실도 공개했다. 또 자신은 빨치산 태병렬의 아들이 아니나 부인인 오혜선씨는 빨치산 오백룡과 혈연관계라고 전했다.

그는 탈북민이 나오는 TV 드라마인 '불어라 미풍아'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게 만든다며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촛불을 들고 임진강으로 가서 통일을 기원하는 장면으로 끝났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을 말하기도 했다.

달변인 태 전 공사는 2시간 반 동안 진행된 기자간담회에서 유머를 섞어가며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