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

여성공대생들이 사연을 나누다... 토크콘서트 ‘어쩌다 아름이’ 개최

“[20대/취업] 중상위권 대학의 ‘취업깡패’라는 ‘전화기(전기전자/화학/기계)’ 학과 나왔어요. 취업이 잘된다는 건 남자들만의 얘기고, 기사 자격증 따고 영어 점수도 만들었지만 면접 한 번 가기도 힘들어요. 주위 여자 동기들은 벌써 다른 분야 취업, 대학원 진학, 공무원 시험 준비로 길을 바꿨어요. 저보다 모자란 남자 동기들이 먼저 취업하는 걸 보면 속이 쓰려도, 이 분야에서 당당히 살아남고 싶어요.”
(취업준비생 김OO)

“[20대/연애] 자발적 ‘연애고자’에요. 제 직업에 만족하고 있고 회사에게 투자한 금액도 상당합니다. 퇴직할 경우 매몰비용이 큰 고급인력이죠. 그러다 보니 경력단절이 무서워서 연애단절을 시작했어요. 너무 오래 연애를 안 하니 슬슬 걱정이 됩니다.”
(드론 파일럿 이OO)

“[30대/유리천장] 결혼을 한 뒤 제가 진행하던 프로젝트에서 배제됐어요. 결과물은 꽤 좋은 학술지에 실렸죠. 동료들이 뒤에서 왜 아이 낳으러 들어가지 않느냐고 수군대는 데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정작 저는 실적을 뺏겨 이직하기도 어려운 데 말이에요.”
(포닥 이OO)

“[30대/경력단절] 공대 나와 남성 중심 기업 연구소에서 일했어요. 결혼해 연년생 아이 낳고 보니 어느새 하이에나처럼 구직 사이트를 어슬렁대는 ‘경단녀(경력단절여성)’가 됐더라고요. 저는 점점 작아져서 볼펜똥만큼 남았는데 학부밖에 나오지 않은 제가 무슨 일을 더 할 수 있을까요?”
(경력단절여성 김OO)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이하 WISET)가 지난 20일 토요일 서울시 강남구에 위치한 롯데 액셀러레이터에서 ‘사연’ 많은 이공계 여자들의 만남 설립 5주년 기념 토크콘서트 <어쩌다 아름이>를 개최했다고 22일 밝혔다.

온라인을 통해 사전에 취합한 사연은 230여 개에 달했다. 학점, 연애, 취업, 결혼, 육아, 경력단절, 재취업, 창업 등 이공계 여자들이 삶에서 부닥치는 거의 모든 문제들이 한 데 모였다.

그 중 절반 이상이 취업, 나머지 절반 이상이 전공, 휴학, 경력단절, 이직 등 진로에 대한 광범위한 고민이었다. 230여 건의 고민 중에 연애에 대한 질문이 단 두 건 뿐이었다는 건, 각박한 이공계 여성들의 현실을 방증한다. 결혼과 출산, 육아, 경력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압도적이어서 차마 연애조차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을 살고 있다.

20대부터 50대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패널들은 세대와 처지를 뛰어넘어 함께 고민을 나눴다. ‘쎈 언니’로만 알려졌던 여명숙 게임물관리위원장은 “연애야말로 궁극의 가상현실을 체험하는 것”이라며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건 남성들이 갖지 못하는 경력 한 가지를 더 갖추는 일”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철학에서 게임까지 수차례 길을 바꿨고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정규직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며 “전공과 일이 일대일 대응되지 않는 시대에 개개인의 고유함을 살려 새로운 길을 만들라. 절대로 미리 두려워하지 말라”고 밝혔다.

여 위원장은 “여자들이 한 데 모여 판을 바꾸고 ‘대왕몬’을 잡으려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그들이 무서워하는 캐릭터로 성장할 것”이라며 “다음번에는 아예 법과 정책을 내놓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공계 대학 페미니스트 연합을 만든 대학생 강미량(포스텍 화학과 4학년) 씨는 혼자서 대응하기 어려운 성차별, 성폭력에 대한 연대를 약속하며, “도망가지 않겠다”고 말해 또래들의 마음을 샀다. IT업계에서는 보기 드물게 두 아이를 키우는 워킹맘 박조은(엔비티 엔지니어) 씨는 “육아휴직을 둘러싸고 근로감독관을 통해 전 직장에 법적인 대응을 하는 과정에서 ‘게임업계에서 매장당할 것’이라는 걱정과 위협을 동시에 들었다”고 토로하면서 “그러나 프로그래머가 일할 수 있는 곳은 게임업계 말고도 많았다”고 용기를 주기도 했다.

1부와 2부 진행은 소셜벤처 <걸스로봇> 이진주 대표와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읽어주는남자들(과정남)> 박대인·정한별 씨가 나눠 맡았다. 이 대표는 두 번의 경력단절을 겪고 난 뒤 비슷한 처지의 이공계 아름이들을 돕는 스타트업을 차린 경험을 들려줬다. 여성 모임의 ‘소수자’로 출연한 과정남 두 사람은, 과학기술계의 경계인이자 이공계 여성들의 조력자로서 보고 듣고 느낀 일들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포항에서 참석한 20대 교직원 강지우 씨는 “공대 아름이들이 꾹꾹 참으며 혼자서 열심히 버텨왔구나 싶었다. 이 자리에 와서 그걸 나누고 싶다는 절심함이 느껴졌다. 여자들이 모이고 얘기하고 지지하는 모임들이 더 자주, 더 여러 곳에서 생겨나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행사를 총괄한 WISET 한화진 소장은 “여성은 이공계의 소수자로서 여러 어려움에 처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 지점에서 다른 여성들과 연대하면서 돌파구를 마련하고 더 의미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다”며 “다음에는 여성 과학기술인을 위한 정책 해커톤 같은 자리에서 신나게 다시 만나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