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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슬 : 4.3사건에서 반공이 아닌, 학살을 말하다

 

위 사진은 '지슬 : 끝나지 않는 세월2' 란 영화의 한 장면이다. 흑백 화면이라 오래된 영화같은 느낌이 있지만, 2013년에 개봉한 나름 신작인 독립 영화다.

이 영화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영화 속의 언어가 한국어인데도 한국어 자막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자막을 보지 않고 영화를 보면 대화를 전혀 알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이 모두 제주도민이며, 사용하는 말도 제주도 사투리기 때문이다.

사투리를 사용하는 제주도민과 표준말을 사용하는 군인들 간의 대비는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제주도 사투리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데도 군인을 피해 동굴에 숨어 좋아하는 여자 이야기, 돼지 밥을 안 주고 와서 어떻게 하냐는 제주도 주민들의 순박한 대화는 친근하게 다가오고, 군인들이 표준어로 내뱉는 욕설은 차갑게 느껴진다. 흑백 화면인 덕분에 거침없이 잔인해지는 앵글과, 귀에 거슬리는 거친 군인들의 말은 그들의 비인간성을 한층 강조하는 장치가 된다.

 


그 와중에서도 더 악랄하게 느껴지는 인물이 있다. 빨갱이 토벌대의 간부인 '김상사' 다. 그는  위 사진에선 바닥에 누워있는 인물이며, 저 장면에선 마약에 취해 토벌을 나가는 병사들에게 여자를 잡아오라고 지시한다. 그는 잔인하게 주민들을 학살하며, 잡아온 여자는 겁탈한다. 마지막엔 참다 못한 이등병 병사가 그를 솥에 가두고 삶아서 죽인다.

영화니까 저런 인물이 존재하는거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김상사는 4.3 사건에서 폭도 진압 임무를 수행하던 9연대 정보참모인 탁성록 대위란 인물을 모델로 해서 만든 캐릭터다. 탁성록 대위는 재판도 없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고 여성을 겁탈했으며, 마약중독자였던 것으로 유명했다. 결국 김상사와 마찬가지로 부하의 응징을 당했고, 그의 악행에 대한 주변 인물의 평가도 아직도 다수 남아있다.

 

4.3사건 진상보고서에 첨부된 탁성록의 모습
4.3사건 진상보고서에 첨부된 탁성록의 모습

 

연대 정보참모가 탁성록인데 그 사람 말 한마디에 다 죽었습니다. 그 때 헌병에게 잡혀가면 살고, 탁 대위에게 잡혀가면 민간인이고 군인이고 가릴 것 없이 다 죽었습니다. 또 서북청년 이 놈들이 고얀 놈들입니다. 처녀를 겁탈하고, 닭도 잡아먹고, 빨갱이로 몰기도 하고. 이 놈들이 사건을 악화시켰습니다. 진압을 하라고 했으면 진압만 하지.... 그래서 도망갈 길 없는 주민들이 더 산으로 오른 겁니다

<당시 9연대 선임하사 윤태준의 증언>

 

탁성록은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병원으로 달려와 소위 아편주사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마약은 함부로 취급할 수 없는 것이라 약재과장을 불러와 결재를 받고 주사를 놔 주었습니다. 그는 팔에 주사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아편쟁이였어요. 안정숙 간호원이 팔뚝에 주사하려 해도 주사 바늘이 들어가지 않자 겨드랑이 밑에 꽂으라고 하더군요. 그는 재임기간 내내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찾았습니다

<의원 경리주임 하두용의 증언>

 

수감자 중에 얼굴이 하얀 사람이 눈에 띄는 게 아닙니까. 이상하다 싶어 물어 보았지요. 오창흔이라는 의사인데 그가 하는 말인 즉, '탁성록 연대 정보참모가 아편주사를 놓아달라기에 거절했더니 잡아넣었다'는 겁니다. 나도 이북에서 공산당이 싫어 월남해 군대에 들어온 사람이지만 이런 놈은 가만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권총을 들고 탁성록을 찾아가 '야, 너 왜 공산당 아닌 사람을 공산당으로 만드느냐. 이 따위로 하면 죽여버리겠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석방시켰습니다. 탁성록은 마흔이 다 된 사람인데 정보참모의 자격도 없는 사람입니다. 군사영어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악대에서 나팔 불던 놈인데 특채됐는지 나보다도 먼저 대위를 달았어요. 이런 저런 구실을 달아 여자들 성폭행을 많이 했어요

<당시 9연대 장교 김정무의 증언>

 

당시 군은 마을을 포위한 상태에서 해안선에서 5Km 떨어진 곳에 있는 자는 모조리 빨갱이로 간주해 죽이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해안선으로 일부 주민들이 나오자 군인들은 그들을 무차별 구타했다. 군화발과 개머리판이 쉴 새 없이 주민들을 향해 쏟아졌고, 사망하는 자가 속출했다.

산으로 숨어들어갔던 주민들은 밤이 되자 숨진 가족들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마을로 내려왔다. 이를 눈치챈 군인들은 유족 19명을 생포해 멍석에 말아 산 채로 태워 죽였다. 그 시신을 돼지에게 먹이고 군인들은 그 돼지를 잡아먹었다. 이는 영화의 내용이 아니라 4.3사건 진상조사에서 주제 주민들이 진술한 내용이다. 그리고 약 반년 간 지속되었던 학살 중 아주 일부분에 불과하다.

 

다랑쉬오름의 동굴에 남아있던 4.3사건 당시 학살 현장 기록사진
다랑쉬오름의 동굴에 남아있던 4.3사건 당시 학살 현장 기록사진

 

김상사, 아니 탁성록은 당시 군이 가지고 있던 광기를 집약해놓은 것 같은 인물이다. '반공'이란 이름 아래 광기를 불어넣은 이승만 정권은 제주도를 짓밟아 놓았고, 제주도민들은 오랜 시간 동안 '빨갱이들의 섬'이란 오명을 등에 지고 살아야 했다.

노무현 정권이 되어서야 4.3사건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졌고, 학살당한 자들 대부분이 남조선 노동당 소속이 아닌 일반 주민이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리고 박근혜 정부는 4월 3일은 제주 4.3사건의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하는 입법 예고를 했다. 70년이 지나서야 그들의 명예가 회복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에서 이런 비극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4.3 사건이 빨갱이들의 국가전복 행위였다고 기억한다. 이 지슬이란 영화는 10만 관람객을 끌어모아 독립영화로서는 크게 성공했다. 하지만 포털의 영화 리뷰를 보면 선동꾼들이 영화 속에서 등장하지도 않는 남로당의 행위가 나오는것처럼 묘사하며 제주도민들을 우롱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들은 진실로 규명된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4.3사건은 진상조사를 통해 진실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4.3을 바라보는 시각은 보수와 진보, 반공과 종북의 논리로 분열되어 있다. 세월호 사건과 마크 리퍼트 주한미국 대사 테러 사건, 홍준표 지사의 무상급식 중단 등 최근의 사건사고에서도, 팩트는 뒤로 미뤄놓고 되도 않는 이념 재단과 음모로 상대방을 음해하는 분위기가 사라지지 않는것 같다. 국론의 분열을 해결하는 것이 국가의 경쟁력을 높이는 가장 시급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