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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성훈 추사랑 마음아픈 한국사. 1만 4천명 학살된 제주 4.3사건

⊙ 추성훈 추사랑 부녀의 뿌리는 제주도

마음이 아프네요.
마음아픈 추성훈 추사랑 부녀의 제주도 이야기

추성훈 추사랑 모녀가 자신의 뿌리인 제주도를 찾았다. 추성훈은 아버지가 옛집 앞 돌담에서 찍은 사진 한 장과 오래된 주소만 가지고 고향을 찾아간다. 촬영 내내 그는 제주도 방문을 '우리의 시작점', '나의뿌리를 찾아가는 길' 이라며 오랫동안 이 날을 기다려왔다고 말했다.

고향집을 찾아가는 도중 바뀐 주소 때문에 헤메기도 하고, 어눌한 한국말이 잘 통하지 않아 고생도 했지만, 그는 딸과 함께 고향을 찾아간다는 마음에 들떠 설레여했다. 하지만 고생 끝에 찾아온 고향집은 주차장과 도로로 변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추성훈은 어쩔 수 없이 주차장 한가운데에서 추사랑과 할어버지에게 전송할 사진을 찍으며 "아 근데 너무 좀 마음이 아프네..."라고 나직이 말했다.

⊙ 너무나 아픈 역사. 제주 4.3 사건

너무나 아픈 한국사 추사랑의 4.3사건 이야기
너무나 아픈 한국사 추사랑의 4.3사건 이야기

2005년 조사한 재일 한국인 숫자는 598,687명이고 그중 본적이 제주도출신인 사람은 99,421 명으로 전체의 16.61%다. 경상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수치다. 제주도 사람들은 조국이 해방된 후 6만명이 제주도로돌아왔다. 하지만, 다시 4만명이 보트피플이 되어 제주도를 도망치듯 쫓겨나게되는데 그것은 제주도에서 공식 집계로만 1만 4천명이 죽는 생지옥, 제주 4.3 사건이 일어났기때문이다.

⊙ 제주도는 주민자치가 가능한 높은 시민의식을 갖춘 곳이다.

제주사람은 혼자서도 잘해요
제주사람은 혼자서도 잘해요

해방이 된 후 한국에는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어 자치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자연스레 인민위원회가 사라지게 되는데, 제주 인민위원회는 달랐다. 제주도는 탐라국으로 독립적인 지위를 누린 역사가 있기때문에 독립의식과 자주의식이 강하다. 여기에 더해 일본에서 6만명이 제주도로 돌아오게 되는데, 일본에서 생활한 이들 중 상당수는 고등교육을 받아서 주민자치를 실현할 수 있을만큼 의식이 깨어 있었다. 제주 인민위원회는 제주도의 유일한 정당이자 정부의 모든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강력한 장악력을 갖추게 된다. 미군정과 사이도 좋아 미군정은 이 단체에‘전심전력의지원(wholehearted support)'을 했다고 되어 있다.

제주인민위원회의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광범위한 지지를 받은 자치기구였다는 점
2) 항일투쟁 경험자들이 주도했다는 점
3) 온건한 정책을 추구했다는 점
4) 미군정 중대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는 점
5) 존속기간이 전국에서 가장 길었다는 점
6) 중앙이나 전남 인민위 조직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어 독자성을 가졌다는 점

⊙ 미군정이 친일경찰에게 치안을 맡기며 갈등이 생긴다.

친일 경찰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간부가 되었대요.
친일 경찰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간부가 되었대요

태평양 전쟁이 갑자기 끝나면서 가장 당황한 조직이 조선총독부 아래있던 조선인 경찰들인데, 해방된 후 말 그대로 도망치듯 사라져버린 상태였다. 하지만, 미군정은 일제시대 관리들을 대거 재등용했다. 특히 친일경력의 경찰관들마저도 군정경찰관으로 변신하였다.군정은 초기에 치안 확보문제를 경찰력에 의존하는 정책을 펴갔다. 따라서 군정경찰은 해방 이후 최대의 물리적 강제력을 갖는 기구로서, 전투경찰로서의 성격도 갖고 있었다. 일제시대 101명이던 제주도 경찰력은 제주도제실시 이후인 1947년 2월에는 330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도덕성에도 문제가 있고, 민족 감정도 자극하는 친일경력 경찰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져갔다.

⊙ 3월 1일 등 뒤에서 총을 쐈대요.

등 뒤에서 쐈대요경찰이 등 뒤에서 총을 쐈대요

1947년 3월 1일,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가 3만명이 모인가운데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열리고, 기념식을 마친사람들은 시내 시위를 한다. 시위대가 지나간 후 200명정도 관람 관중이 있던 관덕정앞 광장에서 오후 2시 45분께 기마경관이 탄 말에 6살 어린이가 말발굽에 채이지만, 경관은 그냥 지나치려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당황한 기마경관은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아갔는데,경찰서에 있던 동료들은 사람들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한다. 이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희생자 가운데는 국민학생과 젖먹이를 안고 있던 20대 여인등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사망자의 신원은 허두용(許斗鎔?15세?제주북교 5년), 박재옥(朴才玉?21세?여), 오문수(吳文壽?34세), 김태진(金泰珍?38세), 양무봉(梁戊鳳?49세), 송덕수(宋德洙?49세)로 밝혀졌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희생자 중 1명을 빼놓고 나머지 모두 등뒤에 총탄이 맞은 것으로 판명됐다. 연이어 도립병원에서도 발포 사건이 벌어지는데 경호를 보던 경찰이 피투성이가 된 부상자들을 보자 공포감을 느껴 소총을 난사, 장제우(張濟雨) 등 행인 2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명백한 경찰의 잘못이었지만, 경찰당국은 사건이 발생된 3월 1일 초저녁부터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충청도에서 100명, 전라도에서 100명의 응원경찰 지원을 요청한 가운데, 민심 수습보다는 발포의 정당성을 강조하는데 주력한다.

⊙ 3월 10일 4만명 총파업

아무것도 안할거에요
아무것도 안할거에요

1947년 3월 10일부터 제주도에서 한국에서는 유례가 없었던 민?관 총파업이 시작되었다. 관공서뿐만 아니라,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 근로자, 각급 학교, 심지어는 미군정청 통역단 등 공무원과 회사원, 노동자, 교사, 학생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파업이었다. 파업에는 현직 경찰관들도 동참하는데, 직장 이탈사태로 나중에 경찰관 66명이 파면 처분된다. '제주경찰사'는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 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해 그 숫자는 166개 기관?단체에 41,211명이 참여했다고 밝히고 있다. 직능별 파업실태는 다음과 같다.

△제주도청을 비롯한 군?읍?면사무소 등 23개 기관 515명
△제주농업학교 등 중학교 13개교 교직원?학생 3,999명
△제주북교 등 국민학교 92개교 35,861명
△제주우체국 등 우체국 8개소 136명
△제주여객 등 운수회사 7개 업체 121명
△식산은행 등 은행 8개소 36명
△남전 출장소 등 15개 단체 542명

⊙ 검거, 방화, 고문

막 포위하고 잡아들여요
막 포위하고 잡아들여요

경찰은 3월 15일부터 파업관련자를 검거하기 시작해 4월 10일까지 500명 가량을 검거하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차례 군중에게 총을 쏘는 사건이 반복된다. 경찰은 무분별한 체포를 하는데서 나아가 고문을 일삼으며 1948년 3월에는 청년 3명이 고문으로 잇따라 숨지는 사건이 발생해 제주 사회의 민심이 동요한다.

⊙ 남로당의 무장봉기
남로당은 미군정하에서 합법정당이었으며 남로당 제주도위원회는 1947년 3월 1일 발포사건이후 조직을 확대하며 당원들을 비밀리에 관리했다. 그런데 1948년 1월중순 조직부 연락책 김생민이 검거되었고, 고문과 회유를 통해 남로당 제주조직체계가 노출되고 1월 22일 도당조직의 조직부장인 김달삼의 아지트 조천면 신촌리를 급습해 폭동을 기획했다는 문건을 토대로 남로당원들을 검거하지만, 흐지부지 풀어준다. 어쨌거나 조직체계가 드러난 남로당은 자신들의 조직을 과신하고 향후 국내외 상황을 오판한채 무장투쟁을 기획한다. 진상조사에 따르면 중앙당의 지령은 없었고 경찰과 서청에 대항하기 위해 제주도 안에서 자체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를 전후해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올랐다. 350명의 무장대는 이날 새벽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또한 경찰, 서북청년회 숙소와 독립촉성국민회,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집을 지목해 습격하였다. 이는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6년 6개월간 지속된 유혈사태의 시작이었다.

경찰 피해사항
△화북=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2명, 지서 전소
△신엄?구엄=경찰 부상 1명, 민간인 사망 5명?부상 10여 명, 무장대 사망 2명, 민가 방화 4채
△남원=경찰 사망 1명, 민간인 사망 1명?부상 2명
△한림=경찰 사망 1명?부상 2명, 민간인 부상 6명, 무장대 생포 1명
△외도=경찰 사망 1명
△함덕=경찰 행방불명 2명
△세화=경찰 부상 2명

⊙ 미군정의 초기 대응
처음에는 경찰과 제주도민간 갈등으로 인한 치안상황으로 보고 경찰만이 진압에 동원되었다. 그러나, 도민과 갈등상태에 있던 경찰은 민간인을 무장대로 몰아 죽이거나 산에 방화를 하고 무장대가 벌인 짓이라고 하는 등 해결의 실마리가 잡히지 않자, 곧 군대가 투입이되고 무장대의 김달삼과 김익렬 연대장은 1948년 4월 28일 평화협상을 맺는다. 하지만 5월 1일 서북청년단이 오라리에 방화를 해서 민가 12채를 태우고 무장대에 의한 것이라고 조작을 한다. 한편 5월 3일, 김익렬-김달삼 간의 평화협상에 따라 ‘귀순’의 성격을 띠고 산에서 내려오던 사람들이 정체불명의 자들로부터 총격을 받는 사건이 벌어져 평화협상이 깨지는 계기가 되었다. 김익렬 연대장은 총격을 가한 자를 잡아보니 경찰이었으며, 취조한 결과 ‘상부의 지시에 의해 폭도와 미군과 경비대 장병을 사살하여 폭도들의 귀순공작 진행을 방해하는 임무를 띤 특공대’라고 자백했다
김익렬 연대장은 이같은 경찰의 행태에 대해 “경찰은 폭동진압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과오와 죄상을 은폐하기 위하여 오히려 폭동을 조장, 확대하려고 하였다. 경찰들은 폭도를 가장하여 민가를 방화하고는 폭동의 소행으로 선전하고 다녔고, 이렇게 되자 폭도들도 산에서 내려와 각 지서를 습격하여 중지되었던 전투가 다시 개시되었다”고 밝혔다.

⊙ 계엄령과 대량 학살

동굴에 그대로 누운 유골들
동굴에 그대로 누운 유골들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강경진압 작전이 진행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은 대학살이 실행된다. 1949년 2월까지 4개월간 진압군은 중산간마을 95%이상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집단으로 살상한다. 마을에서 산으로 도망쳐도 진압군에의해 죽어야했고, 해변마을에서도 서북청년회 단원들에 의한 집단 살상이 벌어졌다. 진상조사에 따른 공식 집계만 14,000 명이 죽는 생지옥이 벌어졌다.잠정적으로 4?3사건 인명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나 6만명이상 죽었다는 것이 제주도의 정서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고 적고 있다. 500명을 토벌하기 위해 제주도민 30만을 모두 죽일 수 있다는 것이 군지도부의 입장이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한편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서도 30~50명 가량이 희생된 것으로 드러났다.

⊙ 일본으로 도망간 사람들
1945년 해방과 동시에 일본에서 6만명의 제주도민이 고향으로 돌아왔었다. 제주도는 전략적 요충지로 일본 본토에서 정기선을 운영해가면서 사람이건 물자건 뺏어가면서 못 살게 구는 통에 그 어느 곳보다 일제의 수탈이 심하고 반일 감정이 높은 곳이다. 그러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생지옥을 피해 보트피플이 되어 너무나 싫어하던 일본으로 도망간다. 이름그대로 사랑스러운 사랑이에게도 마음아픈 한국사가 가족사로 남아있다.

일본으로 도망가요
일본으로 도망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