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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최종현 SK 회장 26일 20주기.."대한민국 핵심 산업 일으켜"

"석유 한방울 나지 않는 대한민국을 무자원 산유국으로 만들고, 석유에서 섬유까지 수직계열화를 완성했으며, 세계 최초 CDMA 상용화로 ICT 강국의 기반을 닦았다."




▲(왼쪽에서 두번째) 폐암 수술을 받은 故 최종현 회장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 경제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왼쪽에서 두번째) 폐암 수술을 받은 고 최종현 회장이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9월, 산소 호흡기를 꽂은 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 참석, 경제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고(故) 최종현 SK 회장이 오는 26일로 타계 20주기를 맞는다.

대한민국을 이끌 인재를 키우겠다는 일념으로 사재를 들여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 가난한 대한민국 청년들을 조건없이 유학보내는 등 평생을 인재양성에 힘썼다고 SK그룹은 전했다.

자본, 기술, 인재가 없었던 1973년 당시, 선경(현 SK)을 세계 일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섬유회사에 불과한 SK가 원유정제는 물론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한 것이었다. 중동 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1983년부터 해외유전 개발에 나섰다. 성공확률이 5%에 불과해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사업을 추진,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개발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이 무자원 산유국 대열에 오르는 순간이었다"고 전했다.

이후, 1991년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하며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동력으로 삼은 그는 미국 ICT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법인을 설립해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1992년 압도적 격차로 제2이동통신사업자에 선정됐다"며 "그러나, 특혜시비가 일자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다"고 전했다. 2년 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 이동통신사업에 진출했다. 당시, 주당 8만원 대이던 주식을 주당 33만5000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주변에서 재고를 건의했으나, 그는 "이렇게 해야 나중에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다"며 "앞으로 회사 가치를 더 키워가면 된다"라고 설득했다.


▲고 최종현 회장이 1986년 해외 유학을 앞둔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고 최종현 회장이 1986년 해외 유학을 앞둔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최 회장은 SK의 성장조차 불투명했던 1970년대부터 인재양성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고 한다. 1972년에 조림사업으로 장학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해개발(현 SK임업)을 설립했다. 1974년에는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설립했다. 재단은 당시, 서울 집 한 채 값보다 비싼 해외 유학비용은 물론 생활비까지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고 한다. 44년간 약 3700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740명의 해외 명문대 박사를 배출했으며 80% 이상이 교수로 재직 중이다. 동양계 최초 예일대 학장인 천명우(심리학과), 한국인 최초 하버드대 종신교수 박홍근(화학과) 등 세계적 석학이 됐다.

최 회장은 1998년 8월 26일 69세의 일기로 생을 마쳤다. 화장(火葬)이 드물었던 시절, 화장 유언을 남겼고 가족들이 이를 실천했다. 폐암으로 갑작스레 타계하기 직전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하고, 훌륭한 화장 시설을 지어 사회에 기부하라"라는 유언을 남겼다. SK그룹은 그의 유언에 따라, 2010년 1월 500억원을 들여 충남 연기군 세종시 은하수공원에 장례시설을 준공해 세종시에 기부했다.

SK그룹은 최 회장 20주기를 맞아 그의 업적과 경영철학을 기리고 있다. 구성원의 기부금을 모아 숲 조성 사회적 기업인 트리플래닛에 전달, 5만평 규모의 숲을 조성키로 했다. 14일부터는 고인의 업적과 그룹의 성장사를 살펴 볼 수 있는 20주기 사진전을 주요 사업장에서 개최하고, 24일에는 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경영철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