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이후 엔화 가치가 가파르게 떨어지면서 일본 중앙은행이 대규모 금융완화 기조를 바꿀지 주목된다.
최근의 급격한 엔화 약세는 국내외 금리차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금리를 올리는 게 가장 효과적인 엔화 가치 방어 수단이 된다.
그러나 일본은 미국과 달리 경기 회복 속도가 느린 데다 막대한 규모로 발행된 국채 상환의 부담을 키울 수 있다는 점에서 금리 인상 카드를 쓰기 쉽지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엔·달러 환율 128엔대로…20년 만에 최고
19일 도쿄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장중 128.21엔까지 올라 2002년 5월 이후 약 20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근 13거래일 연속 오름세다. 지난 3월 이후 11%나 뛰었다.
급격한 엔화 약세의 원인으로는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 확대가 꼽힌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은 금리 인상에 나섰지만, 일본은행은 대규모 금융완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지난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도 단기금리를 -0.1%로 동결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는 0% 정도로 유도하는 금융완화를 계속하기로 했다.
일본의 장기금리는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낮은 수준인데 일본은행은 지난달 말부터 장기금리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대규모로 국채를 매입하고 있다.
미·일 금리차 확대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면서 엔화 가치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
엔·달러 환율이 조만간 130엔을 넘어서고 135엔에까지 도달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일본은행 총재 엔저 입장에 변화
이쯤 되자 엔저가 일본 경제에 긍정적이라고 말해온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도 전날 급격한 엔화 가치 하락이 "경제에 마이너스로 작용하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사실상 견해를 수정했다.
구로다 총재는 "중소기업 등이 (엔화 가치 하락에 따른) 수입 가격 상승분을 (가격에) 전가할 수 없으면 수익이 감소한다"면서 "산업별로 마이너스도 있어 주의해서 볼 필요가 있다"며 엔저의 부정적인 측면을 언급했다.
스즈키 슌이치 재무상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급격한 (환율) 변동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미국 등의 통화당국과 긴밀히 의사소통하면서 적절히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로다 총재와 스즈키 재무상은 2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주요20개국(G20)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해 미국 통화당국 등과 환율 문제를 협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서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 수정해야"
수입 물가 상승과 기업 실적 악화 등 엔저의 부정적인 영향이 부각되면서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수정해야 한다는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학 명예교수는 "기업이 수입 가격 상승분을 소비자 가격에 충분히 전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번 엔저는 기업 실적에 긍정적이라는 인식을 무너뜨리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며 "엔저를 멈추려면 일본은행의 정책 변경이 불가피하며 금리 상승을 용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세라 레이코 미쓰이스미토모신탁은행 시장전략가도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최근 엔저는 가계에 고통을 주고 있다"며 "일본 경제에 미치는 마이너스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일본은행은 급등이 예상되는 4월 물가상승률을 고려해 현재의 강력한 금융완화 지속 기조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수입 원자재 및 에너지 가격 상승 등의 영향으로 4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에 도달할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일본은행은 통화정책의 목표로 '물가상승률 2% 도달'을 내걸어왔기 때문에 이 목표를 달성하면 대규모 금융완화 기조의 변경이 논의될 가능성이 있다.
조강래 한국은행 도쿄사무소 소장은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물가 상승세가 안정적으로 지속돼야 일본은행의 정책 변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물가상승률 2%의 지속성과 경기 회복을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 변경의 조건으로 꼽았다.
▲막대한 국채 발행으로 금리인상 땐 재정부담
일본은행이 추가로 고민해야 하는 변수는 금리를 올리면 막대한 규모로 발행된 국채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커진다는 점이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의 국채 잔액은 작년 말 기준 처음으로 1천조엔(약 9천650조원)을 넘었다.
일본은행이 금리를 1~2%포인트 올리면 정부의 연간 원리금 부담액이 3조7천억~7조5천억엔(35조7천~72조3천억원) 늘어나는 구조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50%를 넘어선 일본에선 금리 인상이 급격한 재정부담 증가로 이어질 수 있다.
이로 인해 일본은행이 당장 금리 인상에 나서기보다는 장기금리 변동 허용 폭 확대 등 단계적인 정책 변화를 시도할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