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정유업계가 올해 1분기 합산 영업이익 6조 원에 육박하는 호실적을 거뒀으나 이익의 절반 이상이 유가 상승에 따른 장부상 가치 상승분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현금 흐름을 동반하지 않는 재고 관련 이익이 실적의 50~60%를 차지하고 있어 향후 국제 유가 하락 시 정유사들의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할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국내 정유 4사의 올해 1분기 영업이익이 시장의 예상을 크게 상회하며 역대급 실적을 기록했으나 업계 내부에서는 실속 없는 '착시효과'라는 신중론이 확산하고 있다. 17일 정유업계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 GS칼텍스, 에쓰오일, HD현대오일뱅크 등 4사의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5조 9,635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였던 2022년 2분기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지만 중동 분쟁에 따른 유가 급등이 불러온 일시적 현상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각사별 실적을 살펴보면 SK이노베이션이 2조 1,622억 원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냈으며 GS칼텍스가 1조 6,367억 원으로 그 뒤를 이었다. 에쓰오일은 1조 2,311억 원, HD현대오일뱅크는 9,335억 원의 영업이익을 각각 기록하며 정유업계 전반이 고른 성장세를 보였다. 하지만 이러한 호실적의 이면에는 국제회계기준(IFRS)에 따른 재고 평가 방식의 특수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번 분기 영업이익의 약 50%에서 60%는 실제 제품 판매를 통해 얻은 마진이 아닌 재고 관련 이익으로 파악됐다. 유가가 상승하면 과거 저가에 도입한 원유 재고의 장부상 가치가 현재 시장 가격과 희석되면서 평가 이익이 발생한다. 여기에 원유 도입 시점과 제품 판매 시점의 시차로 인해 발생하는 '래깅효과(Lagging Effect)'가 더해지며 실적이 부풀려지는 구조다.
최근 SK이노베이션 측은 1분기 실적에 대해 "래깅효과와 재고 관련 이익은 회계 장부상 숫자로 향후 유가 하락 시 줄거나 소멸할 수 있는 일시적 이익이다"라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는 현재의 고이익 구조가 시장의 펀더멘털 개선보다는 대외 지정학적 리스크에 기대고 있음을 시사한다. 실제로 중동 전쟁이 정상화 국면에 접어들어 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서면 재고 평가 이익은 곧바로 재고 손실로 전환된다.
과거 사례를 비추어 볼 때 정유업계의 이러한 호실적은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22년 상반기 정유업계가 12조 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기록했을 당시 정치권에서는 과도한 이익을 환수해야 한다는 '횡재세' 논의가 거세게 일어난 바 있다. 그러나 이후 실적이 급격히 둔화하면서 논의가 사그라들었던 만큼 이번 실적 역시 정치적 압박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원유 도입 비용의 상승과 석유제품 수요 둔화는 정유사의 핵심 수익 지표인 정제마진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중동산 원유 수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우회 운송비가 증가하고 수입선 다변화 과정에서 추가 비용이 발생하고 있다. 고유가가 장기화될 경우 소비자의 구매력이 약화되어 석유제품 가격 자체가 하락할 수 있다는 점도 정유사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다.
정부의 정책적 규제 역시 정유업계의 경영 자율성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최고가격제가 2개월 넘게 이어지고 있어 원가 상승분을 제품 가격에 온전히 반영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최고가격제에 따른 손실 보전 기준이나 정산 방식이 불확실하여 향후 보상 규모가 축소되거나 정산이 지연될 위험이 상존한다.
일각에서는 정유사들의 고도화된 정제 능력과 수출 경쟁력이 실적 방어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내수 시장의 가격 통제 속에서도 해외 시장에서의 판매 수익이 전체적인 실적 하락을 저지하는 완충지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수출 경쟁력 역시 글로벌 경기 침체와 수요 감소라는 거대 담론 앞에서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반론이 만만치 않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1분기 실적을 면밀히 뜯어보면 실제 수익성 개선보다는 일시적인 착시효과가 매우 크다"며 "향후 유가 변동과 비용 상승 등 급변하는 경영 환경 악화에 대비할 실질적인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강조했다. 정책적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정유사들은 중장기 경영계획 수립에 어려움을 겪으며 보수적인 경영 기조를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향후 정유업계의 향방은 중동 분쟁의 전개 양상과 국제 유가의 안정화 여부에 달려 있다. 유가 하락 시 발생할 대규모 재고 손실을 상쇄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 제품 비중 확대와 운영 효율화가 시급한 과제다. 시장 질서의 왜곡을 초래하는 인위적인 가격 통제보다는 기업의 자생력을 높일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적 뒷받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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