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공급망 위기 속 실용적 지역주의 천명한 한국, 한미중 통상 수뇌부와 12회 연쇄 회담

이성경 기자
공급망 위기 속 실용적 지역주의 천명한 한국, 한미중 통상 수뇌부와 12회 연쇄 회담
©연합뉴스

 

정부가 중동전쟁 장기화와 글로벌 공급망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실용적 결속을 촉구하며 전방위 통상 외교에 나섰다. 여한구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중국 쑤저우에서 열린 APEC 통상장관회의에서 미국과 중국을 포함한 12개국 및 기구 관계자들과 연쇄 면담을 갖고 핵심광물 공급망 안정화와 다자 질서 복구를 위한 한국의 기여 의사를 명확히 했다. 이번 회담은 개방적 협력을 바탕으로 한 실용적 플랫폼 구축을 통해 지역 경제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이 심화되는 가운데 한국 정부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통상 질서 재편을 위한 주도적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중국 쑤저우에서 개최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공동체(APEC) 통상장관회의에 정부 수석대표로 참석하여 이틀간의 공식 일정을 소화했다고 밝혔다. 이번 회의는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리스크와 공급망 분절화라는 전례 없는 위기 속에서 역내 국가들의 결속력을 시험하는 중대한 분수령이 되었다.

여 본부장은 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지역주의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며 실용적 접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전례 없는 위기 상황 속에서 예측 가능한 지역주의 진전의 중요성이 더욱 커진다"며 "개방적 협력을 위한 실용적 접근이 중요하다는 공감 아래 APEC이 지속적으로 '실용적 협력의 플랫폼'으로 기능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는 이념 중심의 블록화보다는 경제적 실익과 시장 효율성을 우선시하는 보수적 통상 기조를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구체적인 협력 방안으로는 신재생 에너지 확대와 전력망 연계, 그리고 탄소 크레딧 분야에서의 긴밀한 공조 체계 구축이 제안되었다. 여 본부장은 기후 변화 대응이 단순한 환경 문제를 넘어 새로운 통상 장벽으로 작용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역내 국가 간의 기술적·제도적 연계가 필수적임을 역설했다. 특히 탄소 중립 달성을 위한 시장 중심의 해법을 모색함으로써 기업들의 비용 부담을 완화하고 에너지 안보를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디지털 통상 질서의 확립 역시 이번 회의의 핵심 의제로 다뤄졌으며 한국은 이 분야에서 선도적인 기여를 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여 본부장은 인공지능(AI)과 디지털 분야의 국제 규범 형성에 있어 한국의 역할을 강조하며 관련 협력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를 위해 디지털동반자협정(DEPA) 통상장관회의 및 DEPA와 중국 간의 통상장관회의에도 잇따라 참석하여 디지털 경제 영토 확장을 위한 다각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다자무역체제의 근간인 세계무역기구(WTO)의 개혁과 기능 복구를 위한 국제적 공감대 형성에도 주력했다. 응고지 오콘조 이웰라 WTO 사무총장과의 면담에서 여 본부장은 WTO 개혁 논의의 모멘텀을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하고 한국의 적극적인 지원 사격을 약속했다. 특히 전자상거래 무관세 관행(모라토리엄)의 연장 또는 영구화와 투자원활화협정의 조속한 발효를 위한 이행 방안을 심도 있게 논의하며 자유무역 정신의 수호 의지를 재확인했다.

최대 교역국인 중국과는 핵심 원자재의 안정적 수급을 위한 공급망 관리 협력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했다. 리 청강 중국 상무부 국제무역협상대표와의 면담에서는 핵심광물 공급망 안정화를 위한 지속적인 협력 채널 가동 방안이 논의되었다. 이는 자원 무기화 우려가 커지는 상황에서 상호 의존도가 높은 분야의 리스크를 관리하고 시장의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는 전략적 포석으로 해석된다.

미국과는 통상 환경의 안정화를 목표로 한미 양국 간의 기존 합의 사항을 점검하고 현안 해결을 위한 협의를 진행했다. 릭 스와이처 미국 무역대표부(USTR) 부대표와의 만남에서는 지난해 양국 정상이 합의한 한미 공동설명자료의 구체적인 이행 계획이 논의 테이블에 올랐다. 여 본부장은 특히 미 무역법 301조 조사와 관련하여 한국 기업들이 직면할 수 있는 통상 불확실성을 제거하고 안정적인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해 줄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

다만 이러한 다각도의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강대국 간의 패권 경쟁과 자국 우선주의 기조가 여전하다는 점은 한국 통상 정책의 실효성을 제약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미중 갈등의 틈바구니 속에서 실용적 지역주의를 관철시키는 것은 단순한 선언을 넘어 고도의 협상력과 정교한 정책 설계가 요구되는 과제다. 일각에서는 다자 질서 복구에 대한 국제적 합의가 실제 구속력 있는 조치로 이어지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이라는 신중론도 제기된다.

정부는 이번 APEC 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 의장국인 베트남 등 주요국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하여 역내 통상 주도권을 확보해 나갈 방침이다. 여 본부장은 이번 일정 중 베트남을 비롯해 중남미, 대양주, 신남방 주요국 관계자들과도 릴레이 면담을 가지며 한국의 통상 네트워크를 외연적으로 확장했다. 향후 정부는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고 자유롭고 공정한 무역 질서 확립을 위한 정책적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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