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도심의 한 노후 주거지가 주민 주도의 자치 정비사업을 통해 친환경 공동체 아파트로 탈바꿈한다. 단순한 주거 환경 개선을 넘어 기후위기 대응과 돌봄 공동체 복원을 목표로 하는 이번 사업은 기존 도급 방식 정비사업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적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서울 성북구 종암동 81-188번지 일대에서 기존의 단독·다가구주택 33가구를 지하 3층에서 지상 최고 20층 규모의 아파트 130가구로 재건축하는 개운산마을 가로주택정비사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이 사업은 2028년 상반기 준공을 목표로 진행 중이며, 건축가 출신인 이원형 조합장의 주도로 공간 설계부터 운영 방식에 이르기까지 혁신적인 시도를 담고 있다. 일반적인 정비사업이 건설사와 전문 관리업체의 주도로 이루어지는 것과 달리, 이곳은 주민들이 직접 사업의 주도권을 쥐고 공간의 질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 주민 주도형 소규모 정비사업의 새로운 모델
개운산마을 정비사업의 가장 큰 특징은 정비사업 전문 관리업체 없이 조합이 직접 시공사 선정과 공간 구성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통상적인 주택정비사업은 복잡한 행정 절차와 자금 조달의 어려움으로 인해 외부 대행업체나 시공사의 신용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개운산마을 조합은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소규모 주택정비사업 사업자금 대출 보증 상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사업의 독립성을 확보했다. 이원형 조합장은 정부 기금을 통한 재원 마련이 조합이 시공사에 끌려가지 않고 주체적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이러한 구조적 독립성은 단순한 비용 절감을 넘어 주거의 질적 변화로 이어졌다. 조합은 2021년 4월 설립 인가를 받은 이후 2022년 7월 건축심의를 완료하고, 2023년 10월 사업시행인가를 거쳐 지난 2025년 9월 착공에 돌입했다. 조합 설립 5주년을 맞이한 시점에서 이들이 지향하는 목표는 이른바 '똘똘한 한 채'를 넘어선 '평생 한 채'다. 이는 실거주자가 오래 살수록 안정감과 윤택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하며, 물리적 건축물 이상의 사회적 가치를 담아내는 과정이다.
▲ 탄소 감축을 위한 친환경 시공 기술의 도입
기술적 측면에서도 개운산마을은 국내 공동주택 건축의 고정관념을 깨는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파트 단지 전체에 적용된 '외단열 방식'이다. 국내 대다수 아파트는 철근콘크리트 벽체 안쪽에 단열재를 붙이는 내단열 방식을 사용한다. 내단열은 시공이 간편하고 비용이 저렴하지만 단열재가 끊기는 지점에서 열교 현상이 발생하고 결로가 생기기 쉽다. 반면 개운산마을이 채택한 외단열은 건물 전체를 단열재로 감싸 에너지 손실을 극소화하고 결로를 방지한다. 시공 난도가 높고 고층 건물 적용이 까다로워 그간 고급 단독주택의 전유물로 여겨졌으나, 조합은 에너지 효율 극대화를 위해 이를 전격 도입했다.
친환경 시공의 혁신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전체 130가구 중 18가구에는 국내 아파트 최초로 목조 건축 공법이 적용된다. 목조는 콘크리트 대비 탄소 배출량이 현저히 적고 단열 성능이 뛰어나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차세대 건축 방식으로 꼽힌다. 또한 주거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소규모 단지임에도 불구하고 총 10가지의 평면 타입을 설계했다. 1인 가구를 위한 소형 평면부터 층간소음을 최소화한 자녀 양육 가구용 평면, 장애인 가구의 이동 편의를 고려한 복층형 평면 등 입주민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반영한 '콘셉트 하우스'를 선보인다.
▲ 협동조합 기반의 지속 가능한 공동체 운영 시스템
준공 이후의 운영 방식 또한 일반적인 아파트 관리사무소 체계와 궤를 달리한다. 조합은 2022년 별도의 '개운산마을협동조합'을 설립하여 단지 내 커뮤니티 시설과 근린생활시설을 직접 운영할 계획이다. 마을 카페, 상점, 어린이집, 공유 주방 등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조합원들에게 배분되거나 공동체 운영 기금으로 활용된다. 특히 단지 내 일자리를 주민들에게 제공함으로써 은퇴자나 경력 단절 주민의 재취업을 돕는 선순환 구조를 설계했다. 할머니가 이웃의 아이를 돌보거나 주민끼리 서로를 돌보는 상호 부조 시스템이 구체화되고 있다.
공간의 개방성 또한 핵심 가치 중 하나다. 조합은 단지 뒷산인 개운산으로 이어지는 보행로에 전용 엘리베이터와 육교를 설치하여 이를 지역 사회와 공유하는 방안을 지자체와 논의하고 있다. 이는 아파트가 고립된 섬이 아니라 지역의 거점 공간으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이러한 실험적 시도를 브랜드화하기 위해 '커먼즈(Commons)'라는 자체 브랜드를 상표 출원했으며, 이번 종암동 프로젝트는 '커먼즈 종암'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었다. 소유는 개별적으로 하되 운영과 책임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 모델이 서울 도심 정비사업의 새로운 이정표가 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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