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통화와 재정정책만으로는 국가 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담보하기 어려운 구조적 변곡점에 도달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퇴임사를 통해 전통적인 경기 조절 수단의 영향력 약화를 경고하며 노동, 교육, 주거 등 사회 전반의 구조개혁을 중앙은행의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 중앙은행의 역할을 단순한 물가 관리를 넘어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는 싱크탱크로 재정의하며 정책 패러다임의 전면적인 전환을 주문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4년간의 임기를 마치며 우리 경제가 직면한 거대한 구조적 변화와 이에 따른 정책적 한계를 냉철하게 진단했다. 서울 중구 한국은행 별관에서 열린 이임식에서 이 총재는 경제 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로 인해 과거의 성공 방정식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시사했다. 특히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이라는 양대 축만으로는 거시경제의 안정과 성장을 동시에 이뤄내기가 점차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현상은 정책 당국의 역할에 대한 국민적 기대와 실제 정책 영향력 사이의 괴리를 키우고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이 시급하다는 분석이다.
▲ 외환시장 구조 변화와 정책 수단의 한계 노출
이 총재는 외환시장의 변화를 정책 한계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과거 외환시장이 주로 외국인 투자자의 자본 유출입에 의해 좌우되었다면, 현재는 국내 기업과 개인 투자자, 그리고 국민연금과 같은 거주자의 영향력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는 중앙은행의 전통적인 대응 방식을 무력화하고 있다. 과거와 같이 외환시장 개입이나 단순한 금리 조정만으로 환율을 관리하려 할 경우, 시장의 자율성을 해칠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는 시장 참여자의 다변화에 맞춘 정교하고 새로운 관리 기구와 정책적 프레임워크가 필요함을 시사한다.
실제로 이 총재는 임기 중 발생했던 예상치 못한 외부 충격들에 대응하며 우리 경제가 끊임없이 시험대에 올랐음을 회고했다. 그는 지난 4년의 시간을 우리가 예상했던 정책 범위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야 했던 시기로 정의했다. 대외 금리 차 확대와 글로벌 공급망 위기 속에서 한국은행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제한적이었으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도적 개선에 집중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는 정책 당국이 과거의 관행에 안주하기보다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맞춰 실시간으로 정책 도구를 고도화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로 풀이된다.
▲ 국민연금 뉴프레임워크와 공론화의 성과
이 총재는 자신의 임기 중 주요 성과 중 하나로 '국민연금 뉴프레임워크'를 언급하며 제도 개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특히 과거 '서학개미'와 관련한 발언으로 대중과 정치권의 질책을 받았던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의 해외투자가 국내 외환시장에 미치는 영향력을 공론화한 것이 결과적으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평가했다. 비난이 두려워 언급을 꺼려왔던 민감한 이슈를 수면 위로 끌어올림으로써, 외환 수급 구조를 개선하고 시장 안정을 도모할 수 있는 제도적 발판을 마련했다는 자평이다.
또한 그는 한국은행이 통화·금융정책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국내 최고의 싱크탱크로 거듭나야 한다는 철학을 재확인했다. 지난 임기 동안 한국은행은 물가와 금리라는 본연의 업무 외에도 주거, 교육, 균형발전, 청년 고용, 노인 빈곤 등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 20여 편의 심층 보고서를 발표하며 적극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 총재는 구조개혁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만큼, 한국은행이 앞으로도 우리 경제가 당면한 중장기 과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역할을 지속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는 중앙은행이 단순한 시장 감시자를 넘어 국가 경제의 설계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 특정 산업 의존도 심화와 구조적 양극화 경고
최근의 경제 지표에 대해서는 양면성을 경고하는 목소리를 냈다. 반도체 산업의 호황으로 경기와 외환시장이 일정 부분 안정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지만, 이를 마냥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이 총재는 특정 산업에 대한 과도한 의존도가 오히려 우리 경제의 취약성을 가릴 수 있으며, 산업 간, 계층 간 양극화라는 구조적 문제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착시 효과에 가려진 내수 부진과 구조적 저성장 기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경고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임기 중 물가상승률을 주요국 중앙은행보다 빠르게 2%대로 낮춘 점과 가계부채 비율의 하락세를 이끌어낸 점을 주요 지표적 성과로 꼽았다. 특히 '한국형 포워드 가이던스'의 도입을 통해 시장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정책의 예측 가능성을 높이려 노력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결제은행(BIS) 글로벌금융시스템위원회(CGFS) 의장직을 수행하며 한국 금융의 위상을 높였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이러한 성과들은 모두 우리 경제의 펀더멘털을 강화하고 대외 신인도를 유지하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이었음을 강조했다.
▲ 중앙은행의 실력과 국민적 신뢰 구축 과제
이 총재는 한은 행가의 가사인 '국민의 믿음으로'를 인용하며 중앙은행의 권위와 신뢰는 결국 실력에서 나온다는 신념을 전했다. 조직 구성원들에게 안주하지 말고 목표를 높게 잡아 끊임없이 발전할 것을 주문하며,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한 실질적인 전문성 확보를 당부했다. 2026년 4월 20일로 임기를 마친 이 총재는 퇴임 후 자신의 전문성을 활용한 사업이나 후학 양성 등에 전념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한국은행은 이제 신현송 후보자가 이끄는 새로운 체제로의 전환을 앞두고 있다. 신 후보자는 21일부터 공식 임기를 시작할 예정이며, 이날 오후 국회 재정경제기획위원회에서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을 논의하는 등 승계 절차가 긴박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 총재가 퇴임사에서 강조한 구조개혁의 과제와 싱크탱크로서의 한은 역할이 차기 집행부에서 어떻게 계승되고 구체화될지가 향후 한국 경제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 관전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금융진단] 미 증시, 지정학 완화·빅테크 반등에 상승](https://images.jkn.co.kr/data/images/full/98/28/982892.jpg?aspect_ratio=288:168&crop_gravity=northwest&width=2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