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하원이 세라 두테르테 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가결하며 차기 대권 가도를 둘러싼 정국이 전면적인 법정 공방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번 탄핵안은 예산 유용과 대통령 암살 음모 의혹을 핵심 사유로 삼고 있으나, 상원 지도부를 두테르테 측근 세력이 전격 장악함에 따라 실제 해임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필리핀 하원은 11일 본회의를 열고 세라 두테르테 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찬성 255명, 반대 26명, 기권 6명의 압도적 표차로 통과시켰다. 필리핀 헌법에 따라 하원 전체 의원의 3분의 1 이상이 찬성함에 따라 해당 안건은 즉시 상원으로 이송되어 최종 탄핵심판 절차를 밟게 되었다. 이번 소추는 필리핀 정계의 두 거물 가문인 마르코스와 두테르테 가문의 연합이 완전히 붕괴되었음을 상징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탄핵안의 핵심 쟁점은 두테르테 부통령의 공금 유용 의혹과 국가 수반에 대한 위해 시도 여부로 집약된다. 하원은 부통령이 재임 기간 중 예산을 불투명하게 집행하고 뇌물을 수수한 정황이 명백하다고 판단하여 소추를 결정했다. 특히 지난 2024년 11월 자신이 피살될 경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 부부를 암살하라고 경호원에게 지시했다는 부통령의 발언은 헌법 수호 의무 위반의 결정적 근거가 되었다.
로이터 보도에 따르면 필리핀 수사 당국은 해당 발언의 위법성과 실제 실행 가능성을 면밀히 조사해 왔으며 하원은 이를 국가 안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부통령 측은 당시 발언이 자신의 신변 안전에 대한 우려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 실제 범죄 의도는 없었다고 해명해 왔다. 그러나 하원 다수당은 공직자의 언행이 지닌 무게와 법치주의 원칙을 강조하며 탄핵 절차의 정당성을 부여했다.
탄핵안 가결을 주도한 비엔베니도 아반테 하원의원은 이번 사안이 특정 정치 세력 간의 다툼이나 2028년 대선을 겨냥한 포석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그는 "이는 우리가 여전히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믿는지에 대한 문제"라며 법적 절차의 엄중함을 피력했다. 하원의 이러한 강경 기조는 마르코스 행정부의 국정 동력을 확보하고 잠재적 경쟁자를 견제하려는 전략적 선택으로 풀이된다.
반면 두테르테 부통령 변호인단은 성명을 통해 하원의 결정이 정치적 탄압에 불과하다는 논리로 맞서고 있다. 변호인단은 "부통령을 변호할 준비가 완벽하게 되어 있으며 이제 혐의 입증 책임은 고발자들에게 있다"고 밝히며 상원 심판 과정에서의 전면전을 예고했다. 부통령 측은 하원의 소추 과정에서 절차적 결함이 있었음을 지적하며 법리적 대응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필리핀 헌법상 부통령을 해임하기 위해서는 상원의원 24명 중 3분의 2인 16명 이상의 찬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상원에서 탄핵이 확정될 경우 두테르테 부통령은 즉시 직위에서 해임되며 향후 평생 어떠한 공직에도 취임할 수 없는 정치적 사형 선고를 받게 된다. 하지만 현재 상원의 권력 지형은 하원의 의도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급격히 재편되고 있다.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한 당일 필리핀 상원에서는 비센테 소토 현 상원의장이 해임되고 두테르테 부통령의 측근인 앨런 피터 카예타노 의원이 새 의장으로 선출되는 정변이 일어났다. 카예타노 의장은 과거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 시절 외무장관을 지낸 인물로 부통령 가문의 핵심 우군으로 분류된다. 상원 지도부가 두테르테 진영으로 넘어가면서 탄핵심판의 주도권은 사실상 부통령 측으로 이동했다.
현재 상원 내에서 두테르테 부통령을 지지하는 의원은 과반인 13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에이에프피(AFP) 통신 분석에 따르면 이러한 인적 구성을 고려할 때 탄핵 가결에 필요한 16표를 확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상원 지도부가 탄핵심판의 일정과 절차를 관리하게 됨에 따라 이미 한 차례 좌초했던 과거의 사례가 재현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작년 2월에도 거의 동일한 혐의로 탄핵안이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보류되면서 사실상 기각된 바 있다. 당시 대법원은 하원의 절차적 문제를 지적하며 위헌 판결을 내렸고 이후 상원 내 탄핵 동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특히 작년 5월 총선에서 두테르테 전 대통령 진영이 선전하며 민심의 향방이 확인되자 정치권의 탄핵 추진 의지는 크게 꺾였다.
마닐라 산토토마스대학교 데니스 코로나시온 정치학과 교수는 상원의 새로운 구성을 근거로 탄핵안이 기각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진단했다. 그는 "상원의 지도부 교체는 두테르테 부통령에게 강력한 정치적 방패가 될 것"이라며 이번 소추가 법적 성과를 거두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다만 심판 과정에서 공개될 부패 증거들이 부통령의 도덕성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점은 변수로 남는다.
필리핀 국민의 부패에 대한 강한 거부감은 두테르테 부통령이 극복해야 할 가장 큰 과제다. 비록 상원에서 법적으로 구제받더라도 탄핵심판 과정에서 명백한 예산 유용 증거가 노출될 경우 2028년 대선 가도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다. 블룸버그 통신은 필리핀의 고질적인 가문 정치가 이번 탄핵 정국을 통해 더욱 극심한 대립 양상을 보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론적으로 이번 탄핵안 가결은 필리핀 정국의 불확실성을 증폭시키는 촉매제가 될 전망이다. 상원 지도부를 장악한 두테르테 진영은 법적 방어막을 구축하는 동시에 마르코스 행정부의 실정을 부각하며 역공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필리핀의 국가 신인도와 시장 안정성을 위해서는 소모적인 정치 투쟁보다는 투명한 사법 절차를 통한 신속한 정국 수습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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