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새만금·서산 간척의 설계자 이병기 전 농림수산부 차관 별세…향년 87세

이성경 기자
새만금·서산 간척의 설계자 이병기 전 농림수산부 차관 별세…향년 87세
©연합뉴스

 

서남해안 40만㏊ 간척 마스터플랜을 수립해 새만금과 서산지구 간척 사업의 기틀을 마련한 이병기 전 농림수산부 차관이 30일 별세했다. 고인은 박정희 정부 시절 농지국장으로서 식량 자급을 위한 대규모 국토 개조 계획을 주도한 인물이다. 농림행정뿐만 아니라 경주 관광개발과 가락동 도매시장 설립 등 국가 기간 산업 전반에 걸쳐 치밀한 설계 역량을 발휘했다.

이병기 전 농림수산부 차관이 30일 오전 10시 20분께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밝혔다. 고인은 1976년 농수산부 농지국장 재임 당시 서남해안 40만㏊를 간척해 농지를 조성하겠다는 대규모 국토 개발 계획을 수립한 주역이다. 이 계획은 이후 서산지구 간척 사업과 새만금 간척 사업 등 대한민국 지도를 바꾼 대형 국책 사업의 모태가 되었다.

1939년 부산에서 태어난 고인은 부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엘리트 관료였다. 1961년 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며 공직에 입문한 뒤 경제기획원을 거쳐 1968년부터 1973년까지 대통령 비서실에서 근무했다. 이 시기 고인은 경제 개발의 최일선에서 국토 효율화와 산업 기반 구축에 매진하며 정책 기획 역량을 쌓았다.

대통령 비서실 근무 시절 고인은 경주 보문관광단지 개발 계획인 '경주 관광개발 계획'에 깊이 관여하며 국토 개발에 대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고인과 함께 일했던 조일호 전 농림부 차관은 "고인은 비서실 재직 시절부터 국토 개발에 지대한 관심과 능력을 보였다"고 회고했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고인이 농업 행정의 틀을 바꾸는 데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1975년 농수산부 농지국장에 부임한 고인은 곧바로 서남해안 간척 마스터플랜 수립에 착수했다. 농지국과 농업진흥공사의 기술 인력을 총동원해 전국의 갯벌을 직접 답사하고 측량하는 정밀 작업을 진두지휘했다. 그 결과 간척 농지로 개발 가능한 면적이 총 40만㏊라는 구체적인 수치를 산출해 정부에 보고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당시 식량 증산을 강하게 지시했으나 서남해안 전체를 아우르는 간척 사업의 구체적 청사진은 고인의 머리에서 나왔다. 고인은 1978년 서남해안 간척 사업 계획을 확정 짓고 강화도와 완도 등 도서 지역에서도 여러 간척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조 전 차관은 "대통령의 지시를 넘어 고인이 스스로 국토 개조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농업 인프라 구축뿐만 아니라 유통 체계 현대화에도 고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1978년 농업경제국장 재임 시에는 현재 수도권 농수산물 유통의 핵심인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 설립 계획을 세웠다. 전국적인 농수산물 시장 설립의 표준을 제시하며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효율적 시장 질서를 구축하고자 했다.

공직 생활 중 시련의 시기도 있었으나 고인은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관료의 자세를 견지했다. 1980년대 초 식량차관보 시절 미국 쌀 도입 물량에 대한 정치권의 비판이 거세지자 정책 결정의 책임을 지고 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당시 조 전 차관은 "쌀 도입량은 총리가 결정한 사안이었음에도 고인이 모든 비판을 감내하며 조직을 보호했다"고 전했다.

고인의 업무 스타일은 조직적이고 치밀하며 대단한 업무 의욕을 가진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1988년 농림수산부 차관을 역임한 후 1990년부터 1996년까지 남해화학 사장을 지내며 민간 영역에서도 경영 능력을 발휘했다. "굉장히 조직적이고 치밀한 분"이라는 후배들의 평가는 고인이 평생을 바친 국토 설계의 정밀함을 뒷받침한다.

일각에서는 대규모 간척 사업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식량 안보가 국가 존립의 과제였던 시대 상황 속에서 고인이 보여준 효율성 중심의 국토 개발 전략은 경제 성장의 토대가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법치와 원칙을 중시하며 시장 질서를 세우려 했던 고인의 정책 철학은 보수적 관료 사회의 귀감이 되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혜자 씨와 이원국, 이원철, 이윤행 씨 등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3호실에 마련되었으며 발인은 6월 1일 오전 6시 30분이다. 장지는 용인천주교공원묘원으로 정해졌으며 고인은 평생을 설계한 국토의 품에서 영면에 들 예정이다.

저작권자 © 재경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새만금·서산#간척의#설계자#이병기#농림수산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