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이 핵심 외교 안보 현안 결정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헝가리 등 일부 회원국의 거부권 행사가 잇따르면서 의사 결정 시스템의 개편 요구가 증폭된다. 역내외 주요 도전에 대한 유럽연합의 대응 능력에 대한 우려가 커진다.
▲ 유럽연합 의사결정 시스템의 한계 노출
유럽연합은 외교 및 안보 정책, 신규 회원국 승인과 같은 민감한 사안에 대해 27개 회원국 전원의 만장일치 원칙을 따른다. 이와 달리 일반 입법 및 정책은 15개국 이상이 찬성하고 이들 회원국 인구가 유럽연합 전체의 65%를 넘어서면 통과되는 가중 다수결 방식을 채택한다. 그러나 최근 만장일치 제도 때문에 유럽연합의 주요 정책 결정이 사실상 마비 상태에 이르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최근 몇 주간 유럽연합 외교관과 관리들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 대출 지원, 요르단강 서안의 이스라엘 정착민 제재, 러시아 추가 제재 등의 문제에서 단일한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로 인해 유럽연합이 중동 분쟁과 유럽-미국 간 갈등 등 대외 현안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국제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날 위험에 처했다는 진단이 나온다.
▲ 만장일치 제도 개혁 요구와 반대 여론
독일과 스웨덴을 중심으로 만장일치 거부권을 엄격히 제한하거나 아예 폐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독일 외무장관 요한 바데풀은 4월 4일 풍케 미디어 그룹과의 인터뷰에서 현재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임기가 끝나기 전에 외교·안보 정책에서 만장일치 원칙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근 몇 주간 우크라이나 지원과 러시아 제재를 둘러싼 경험이 이러한 필요성을 뒷받침한다고 언급했다. 스웨덴 총리 울프 크리스테르손 또한 지난달 외교 분야에 가중 다수결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이 정상들 사이에서 논의될 것이라고 밝혔다. 요한 바데풀 장관이 제안한 가중 다수결 시스템 하에서는 유럽연합 결정에 회원국 55% 이상의 찬성과 유럽연합 전체 인구의 65% 이상을 대표하는 회원국의 지지가 필요하다.
반면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일부 소규모 국가들은 자국 이익 보호를 위해 거부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벨기에 총리 바르트 더베버르는 만장일치 규칙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것은 그 규칙을 심각한 곤경에 빠뜨리는 가장 빠른 길이라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 헝가리 거부권 행사의 전방위적 영향
헝가리 총리 오르반 빅토르는 러시아에 친화적인 정책을 펼치며 유럽연합의 우크라이나 지원 및 러시아 제재 확대 노력에 수개월째 제동을 걸고 있다. 그는 또한 요르단강 서안 정착민 제재에도 27개국 정상 중 유일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헝가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900억 유로 대출 승인과 관련하여 러시아산 석유 수송을 위한 드루즈바 파이프라인 복구를 자국 승인의 조건으로 내걸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헝가리는 이 문제로 러시아에 대한 20차 제재 패키지와 우크라이나 대출 승인을 막았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 4주년을 앞두고 유럽연합 내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
오르반 총리의 이러한 거부권 행사는 유럽연합의 단합과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고 있으며, 일부 비평가들은 이를 유럽연합 시스템의 구조적 결함으로 지적한다. 헝가리는 2026년 4월 12일 총선을 앞두고 있으며, 유럽연합은 오르반 총리의 실각을 내심 기대하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슬로바키아, 체코 등 친러시아 또는 자국 우선주의 정치 세력이 집권한 다른 회원국들로 인해 유사한 문제에 직면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슬로바키아 총리 로베르트 피초는 이미 헝가리의 의결권 박탈 시 이를 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 유럽연합의 향후 전망과 의결권 박탈 가능성
오르반 총리가 총선 이후에도 자리를 유지할 경우, 만장일치 제도 논의와는 별개로 유럽연합이 헝가리의 의결권을 박탈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유럽연합은 회원국이 법치, 인권, 민주주의를 훼손하거나 예산 관련 규정을 위반했다고 판단하면 의결권을 제한할 수 있다. 유럽의회 의원 페카 토베리는 러시아 일간 이즈베스티야와의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대출 승인을 위해 헝가리의 투표권이 박탈될 가능성이 매우 크며,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선거 직후에 이뤄질 것 같다고 주장했다.
폴리티코 유럽판에 따르면, 유럽연합 회원국들은 헝가리의 거부권 남용에 대응하기 위해 Article 7 발동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논의하고 있으며, 이는 헝가리가 유럽연합의 핵심 가치를 심각하게 위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될 경우 투표권을 박탈할 수 있는 조치이다. 그러나 이러한 '핵무기 옵션'의 발동은 다른 모든 회원국의 만장일치 동의를 필요로 하므로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 이번 헝가리 총선은 오르반 총리의 정치적 미래뿐 아니라, 유럽연합이 당면한 구조적 문제와 결속력 유지에 대한 중요한 시험대가 될 것으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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