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가톨릭 보수 성채 폴란드 동성부부 첫 법적 인정 유럽사법재판소 판결 이행

이겨례 기자
가톨릭 보수 성채 폴란드 동성부부 첫 법적 인정 유럽사법재판소 판결 이행
©연합뉴스

 

유럽 내 성소수자 인권의 보수적 보루로 분류되는 폴란드에서 동성 커플이 사상 처음으로 법적 부부 지위를 공식 인정받았다. 이번 결정은 유럽연합 회원국 간의 혼인 효력을 상호 인정해야 한다는 유럽사법재판소의 판결을 폴란드 사법부와 행정당국이 수용한 결과다. 가톨릭 전통이 강한 폴란드에서 동성 결혼이 법적 효력을 얻으면서 향후 동유럽 국가들의 인권 표준 변화에 중대한 분기점이 될 전망이다.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행정당국이 외국의 법적 절차를 거친 동성 커플에게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등본을 발급하며 이들의 법적 지위를 승인했다. 라파우 트샤스코프스키 바르샤바 시장은 현지 시각 14일 법원 판결에 따라 동성 커플의 혼인 등록을 마쳤으며 향후 별도의 판결 없이도 동성 결혼을 적극 인정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했다. 이번 조치는 그간 성소수자 권리에 극도로 보수적이었던 폴란드 국가 행정 체계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행보로 평가받는다.

이번에 법적 부부로 인정받은 커플은 지난 2018년 독일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폴란드 내 혼인 신고를 지속적으로 시도해왔다. 이들은 폴란드 당국이 자국법을 근거로 혼인 등록을 거부하자 유럽사법재판소(ECJ)에 소송을 제기하며 법적 투쟁을 이어갔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지난해 11월 유럽연합 회원국 내에서 적법하게 등록된 동성 결혼은 다른 회원국에서도 그 효력을 인정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폴란드 최고행정법원은 유럽 법원의 판결 취지를 받아들여 바르샤바 행정당국에 해당 커플의 혼인 등록을 명령하는 최종 판결을 내렸다. 소송을 대리한 아르투르 쿨라 변호사는 "현재 외국에서 결혼한 동성 부부 수십 쌍의 폴란드 내 혼인 등록 절차를 돕고 있다"며 이번 사례가 일회성 사건에 그치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에이피(AP) 통신 등 주요 외신은 이번 판결이 폴란드를 포함한 보수적 동유럽 국가들의 법적 지형을 바꾸는 촉매제가 될 것으로 분석했다.

폴란드는 전체 인구의 70% 이상이 가톨릭 신자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모국으로서 강력한 보수적 가치관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종교적 배경은 성소수자 권리 보호와 임신중단 허용 여부 등 사회적 쟁점에서 보수 진영의 강력한 논거로 작용해왔다. 과거 법과정의당(PiS) 집권 시절에는 낙태 규제가 강화되면서 의료 현장에서 시술을 거부당한 임신부가 사망하는 등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빚기도 했다.

도날트 투스크 폴란드 총리는 이번 판결 이행과 관련하여 과거 정부 체제에서 소외되었던 이들에게 공식적인 사과의 뜻을 전했다. 투스크 총리는 "오랫동안 버림받고 모욕감을 느낀 모든 이들에게 사과한다"며 유럽 법원의 판결을 제도적으로 안착시키기 위한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2023년 12월 집권 당시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요 공약으로 내걸었으나 여전히 거센 정치적 저항에 직면해 있다.

다만 폴란드 내 보수 진영과 연립정부 내 가톨릭 보수파의 반발은 여전히 해결해야 할 핵심 과제로 남아 있다. 우파 야당인 법과정의당은 이번 행정 조치가 폴란드의 헌법적 가치와 전통적 가족관을 훼손한다며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연립정부 내부에서도 가톨릭 가치를 중시하는 일부 세력이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에 어깃장을 놓고 있어 전면적인 입법화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이 폴란드 국내법의 완전한 개정으로 이어지기 전까지는 사법적 판단을 통한 개별적 승인 형태가 지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블룸버그 통신은 폴란드 정부가 유럽연합의 인권 가이드라인을 준수해야 하는 압박과 국내 보수 여론 사이에서 정교한 균형 잡기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결국 이번 동성부부 인정 사례는 폴란드가 유럽의 보편적 인권 표준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진통이자 역사적 이정표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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