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능력에 따라 벌금액을 차등 부과하는 '일수벌금제' 도입이 국회의 무관심 속에 30년 넘게 표류하며 저소득 청년층을 노역장으로 내몰고 있다. 18대 국회부터 현재까지 관련 법안이 11차례나 발의되었으나 자산 파악의 기술적 한계를 이유로 매번 폐기되었으며, 장발장은행 대출자의 85.2%가 20~40대에 집중되는 등 사법 안전망의 공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현행 벌금 제도가 피고인의 경제적 형편을 고려하지 않는 일률적 부과 방식을 고수하면서 사법 정의의 실효성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재산 수준에 비례해 벌금을 산정하는 일수벌금제는 이미 1921년 핀란드를 시작으로 독일과 스위스 등 유럽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제도다. 한국에서도 1992년부터 도입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입법부의 직무유기와 행정적 편의주의에 가로막혀 30년 넘게 의제로만 머물러 있는 실정이다.
입법부의 태만은 구체적인 수치로 증명된다. 일수벌금제 도입을 골자로 한 형법 개정안은 18대 국회부터 21대까지 무려 11차례나 발의되었으나 단 한 차례도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해 민병덕 의원이 대표 발의한 법안 역시 여야의 정쟁 속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며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공전하고 있다.
일수벌금제는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빈부에 따라 체감하는 형벌의 고통이 다르다는 점에 착안한 제도다. 가령 재산이 1억 원인 피고인에게 100만 원의 벌금을 부과한다면, 재산이 10억 원인 피고인에게는 1,000만 원을 매겨 형벌의 실질적 평등을 기하는 방식이다. 이는 단순한 금전적 처벌을 넘어 범죄 억제력을 확보하고 저소득층이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장에 유치되는 악순환을 끊는 데 목적이 있다.
법학계는 이미 제도 도입을 위한 이론적 검토와 사회적 합의가 상당 부분 완료되었다고 진단한다. 최호진 단국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정치적인 이슈와 맞물리며 진행이 안 된 측면이 있지만 도입 필요성과 정당성에 대한 전문가들의 합의는 모인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법리적 타당성보다는 정치적 결단과 행정적 뒷받침이 핵심적인 과제라는 지적이다.
다만 피고인의 소득과 자산을 투명하게 파악해야 하는 기술적 문제는 제도 도입의 주요 반대 논거로 작용한다. 건강보험료나 근로소득이 포착되는 일반 급여 생활자와 달리 지하경제 소득이나 가족 명의의 자산을 확인하는 것은 여전히 까다로운 영역이다. 법원과 검찰이 기존의 징역형 중심 양형 체계를 개편하고 벌금 산정을 위한 정교한 시스템을 구축해야 하는 행정적 부담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거시적인 제도 개선이 지연되는 사이 당장 시행 가능한 구제책들조차 사법당국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고 있다. 현행법상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은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하지만, 대다수 생계형 범죄가 다뤄지는 약식명령 단계에서는 거의 활용되지 않는다. 벌금을 장기 분납하게 하여 피고인의 재기를 돕는 제도 역시 운용의 묘를 살리지 못한 채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사법 시스템의 경직성이 사회적 약자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날 선 비판도 제기된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500만 원 이하 벌금형도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한데 약식명령의 경우 안 된다는 핑계로 거의 이뤄지지 않는다"며 "법 조문 하나만 바꾸면 되는데 국회와 법원, 검찰이 의지가 없는 게 문제"라고 직격했다. 기득권 중심의 시각이 제도 개선의 가장 큰 장벽이라는 분석이다.
경제적 벼랑 끝에 몰린 청년층의 실태는 지표로 확연히 드러난다. 최근 1년여간 장발장은행의 대출 승인을 받은 196명 가운데 경제활동의 주축인 20~40대가 85.2%에 달한다는 사실은 청년 빈곤이 사법적 처벌로 직결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들이 벌금 미납으로 인해 노역장에 유치될 경우 노동력 상실은 물론 사회 복귀 비용을 증가시켜 국가 전체의 손실로 이어진다.
위기 청년층을 범죄의 유혹에서 격리하기 위한 금융 시스템의 전향적인 태도 변화도 요구된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청년 저신용자를 자꾸 낙오시키면 결국 경제활동을 정상적으로 하는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은행권이 일부 부담을 공유하여 이들을 제도권 금융으로 포용하는 것이 장기적인 시장 안정과 선순환 구조 형성에 유리하다는 논리다.
민간 차원에서 '청년 장발장'을 구제해온 장발장은행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의 존재가 불필요한 사회를 지향한다. 오창익 장발장은행 대표는 "우리의 목표는 이 벌금 문제가 해결돼 결국 장발장은행이 사라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국가가 수행해야 할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민간 기부금에 의존하고 있는 현재의 모순적 상황을 단적으로 시사한다.
향후 일수벌금제 도입 논의는 자산 파악 시스템의 디지털화 및 데이터 연동 기술과 맞물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전망이다. 정부와 국회는 벌금형 분납제도 활성화와 집행유예 적용 확대 등 즉각적인 보완책을 마련하여 사법 정의의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법치주의의 근간인 형벌의 평등권이 경제적 격차로 인해 훼손되지 않도록 입법부의 결단과 사법부의 전향적인 행정 개선이 시급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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