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가 '유서 대필 사건' 피해자 강기훈 씨에 대한 국가의 불법행위 책임을 추가로 인정하며 배상 규모를 확대했다. 서울고법은 수사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와 변호인 접견권 방해를 근거로 강 씨 일가에 총 6,700만 원을 추가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번 판결로 30여 년간 이어진 법적 공방 끝에 강 씨 측이 받게 될 총 배상액은 약 10억 1,000만 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서울고법 민사5-1부(송혜정 김대현 강성훈 고법판사)는 21일 강 씨가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 파기환송심에서 국가의 추가 배상 책임을 명시했다. 재판부는 국가가 강 씨 본인에게 5,300여만 원, 배우자에게 500만 원, 두 동생에게 각각 400여만 원을 추가로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이는 수사 과정에서 발생한 개별적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의 파기환송 취지를 충실히 반영한 결과다.
이번 판결의 핵심은 과거 수사 기관이 자행한 위법한 피의자 조사와 변호인 접견권 침해 등을 독립적인 불법행위로 규정했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피의사실 공표와 밤샘 조사 등 인권 침해 요소들이 강 씨와 그 가족들에게 심대한 정신적 고통을 안겼음을 인정했다. 과거 2심은 이러한 행위들의 소멸시효가 만료되었다고 보았으나 대법원은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근거로 이를 뒤집었다.
강 씨 일가가 수령할 최종 배상액은 지난 2018년 판결된 금액에 이번 증액분을 더해 총 10억 원을 넘어서게 됐다. 당시 2심은 강 씨에게 6억 8,000만 원, 배우자에게 1억 원 등 총 9억 2,000여만 원의 지급을 결정한 바 있다. 여기에 대법원에서 확정된 자녀 2명의 배상액 2,000만 원과 이번 파기환송심의 6,700만 원이 추가되면서 전체 규모가 확정됐다.
사건의 발단은 1991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사회부장 김기설 씨의 유서 대필 의혹에서 비롯됐다. 검찰은 강 씨가 친구인 김 씨의 유서를 대신 작성하며 자살을 방조했다는 혐의로 기소하여 징역 3년의 실형을 끌어냈다. 강 씨는 만기 복역 후에도 억울함을 호소하며 투쟁해왔고 2015년 재심을 통해 필적 감정서 위조 사실이 드러나며 무죄를 확정받았다.
법원은 국가 권력의 남용이 개인의 삶을 파괴한 것에 대해 사법적 잣대를 엄격히 적용하여 위자료 액수를 재산정했다. 재판부는 "이 법원 심판 범위인 개별 불법행위와 위법한 피의자 조사 등에 대해 위자료를 추가로 정한 것"이라고 판결 배경을 설명했다. 이는 법치국가에서 수사 기관의 적법 절차 준수가 지니는 헌법적 무게를 재확인한 조치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피해자 측 대리인단은 법원이 수사 조작의 구조적 불법성을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다며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대리인단은 선고 직후 입장문을 통해 "이번 판결은 사건을 개별 불법행위 문제로 한정하여 검찰 주도의 수사 전반에 대한 책임을 외면했다"고 지적했다. 수사 조작과 인권 침해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불법행위임에도 법원이 이를 기계적으로 분리했다는 주장이다.
대리인단은 대한민국 정부가 검찰 주도의 조직적 조작에 대해 전체적인 책임을 인정하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하나의 목적을 향해 자행된 수사 조작은 결코 개별적 사안으로 치부될 수 없다"며 온전한 배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은 향후 유사한 과거사 사건의 책임 소재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주요한 쟁점이 될 전망이다.
이번 판결은 국가배상 소송에서 소멸시효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권 구제의 길을 넓혔다는 점에서 법률적 의의가 크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 이후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에 대한 국가의 무한 책임 원칙이 사법 현장에서 구체화되고 있는 양상이다. 이는 과거의 잘못된 공권력 행사를 바로잡고 미래의 재발을 방지하는 법적 기제로 작동할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은 이번 판결이 향후 진행될 다른 과거사 관련 손해배상 소송에도 상당한 파급력을 미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국가가 법 집행 과정에서 저지른 과오에 대해 시효와 관계없이 엄중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사법부 판결을 통해 공고해지고 있다. 법치주의의 확립과 인권 보호라는 사법부의 본연의 역할이 이번 판결을 통해 다시금 부각됐다.
강 씨의 사례는 공권력의 감시와 견제가 소홀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극적인 인권 유린의 전형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법 정의의 회복 과정을 상징한다. 24년 만의 무죄 판결과 그로부터 다시 10여 년이 흐른 뒤의 배상액 증액은 우리 사회의 정의 구현 속도를 시사한다.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단죄는 단순히 금전적 보상을 넘어 훼손된 명예를 회복하는 필수적인 절차다.
앞으로 정부와 관련 기관이 이번 판결의 취지를 수용하여 피해자에 대한 실질적인 지원과 명예 회복 조치에 나설지 지켜볼 대목이다. 사법부의 판단이 내려진 만큼 행정부 차원에서도 과거의 잘못을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가 법치주의 완성의 마지막 단계가 될 것이다. 피해자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신속한 후속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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