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항공권 환불 대금 약 31억 5,500만 원을 현금이 아닌 바우처로 지급하며 소비자 권익을 침해한 트립닷컴에 대해 시정명령과 과태료 1,000만 원을 부과했다. 이번 조치는 소비자가 결제한 수단과 동일한 방식으로 대금을 돌려줘야 한다는 전자상거래법 원칙을 무시하고 항공사의 불리한 정책을 이용자에게 전가한 행위에 대한 엄중한 경고다. 트립닷컴은 지난 3년여간 1만 3,010건에 달하는 환불 요청을 처리하며 법적 의무를 회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환불 대금을 소비자가 결제하지 않은 다른 수단으로 환급하여 법적 의무를 위반한 트립닷컴 트래블 싱가포르 프라이빗 리미티드와 ㈜트립닷컴 코리아에 대해 제재를 확정했다. 국내에서 트립닷컴 사이트를 공동으로 운영해온 이들 두 법인은 시정명령 및 보고 명령과 함께 총 1,000만 원의 과태료를 물게 되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온라인 여행 플랫폼이 개별 항공사의 환급 정책을 앞세워 국내 소비자 보호법을 무력화하려 시도했다는 점에 있다.
조사 결과 트립닷컴 측은 2020년 2월부터 지난해 7월까지 소비자들이 항공권 구매를 철회한 1만 3,010건에 대해 부당한 환급 방식을 고수했다. 이들은 환급액 약 31억 5,500만 원 상당을 소비자가 원래 결제했던 신용카드나 현금이 아닌 해당 항공사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바우처 형태로 지급했다. 이는 전자상거래 등에서의 소비자 보호에 관한 법률인 전상법을 정면으로 위반한 행위로 간주된다.
비엣젯, 피치, 필리핀 에어아시아 등 일부 저가 항공사가 항공권 예약 취소 대금을 바우처로 제공하는 정책을 펴자 트립닷컴은 이를 여과 없이 수용했다. 플랫폼 사업자는 국내법에 따라 소비자에게 결제 수단에 따른 적절한 환급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공사의 편의를 우선시했다. 공정위는 항공권 취소에 따른 환급이 개별 항공사의 정책에 기반했다 하더라도 해당 정책이 국내 전상법보다 소비자에게 불리할 경우 법 위반에 해당한다고 명확히 규정했다.
현행 전상법은 항공권 등 예약 취소 시 대금을 신용카드 등 기존 결제 수단으로 제공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바우처는 사용 범위와 기간이 제한되어 있어 현금 자산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에 소비자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행위로 해석된다. 트립닷컴은 이러한 법적 원칙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장기간에 걸쳐 바우처 환급 방식을 유지하며 이익을 보전했다.
트립닷컴 싱가포르와 트립닷컴 코리아는 항공권 취소 과정에서 소비자들의 심리적 저항을 줄이기 위해 부당한 안내 문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들은 항공사 규정에 의거해 경우에 따라 환불 금액이 항공사 바우처로만 제공될 수 있다고 공지하며 소비자들의 정당한 청약 철회권 행사를 방해했다. 이러한 행위는 소비자가 환불을 포기하거나 불리한 조건을 수용하도록 유도하는 기만적 행위로 판단되었다.
플랫폼 운영의 기본 요건인 통신판매업 신고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트립닷컴 싱가포르는 2017년 11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트립닷컴 코리아는 2020년 4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신고 없이 국내 소비자에게 항공권 판매 정보를 제공했다. 이는 국내 전자상거래 시장의 질서를 교란하고 행정적 감독을 회피하려 한 무책임한 경영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다만 공정위는 트립닷컴이 사건 조사 과정에서 일부 잘못을 인지하고 시정 조치에 나선 점을 고려했다. 이들은 기존에 바우처로 환급했던 금액을 다시 현금으로 환불하는 등 피해 복구 절차를 진행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지난해 7월부터는 바우처로만 대금을 환급하는 정책을 고수하는 항공사의 항공권을 자사 플랫폼에서 더 이상 판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행정 절차상 미비점이었던 통신판매업 신고 역시 각각 지난해 9월과 1월에 완료하며 법적 요건을 뒤늦게나마 갖추었다. 그러나 수년간 지속된 위반 행위로 인해 이미 수만 명의 소비자가 불편을 겪었으며 온라인 예약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문가들은 글로벌 플랫폼 기업들이 국내 시장에서 수익을 올리면서도 국내법 준수에는 소홀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고 지적한다.
공정위 관계자는 "온라인 여행 플랫폼 등 플랫폼 사업자의 청약 철회권 보장 등 법 준수 여부를 지속해서 점검하겠다"고 밝혔다. 플랫폼 사업자는 단순한 중개자를 넘어 소비자 보호의 최전선에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당국의 입장이다. 특히 국경을 넘나드는 전자상거래가 활발해짐에 따라 해외 소재 법인에 대한 실효성 있는 감독 체계 강화가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일부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사태가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항공업계의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항공사들이 파산을 피하기 위해 현금 대신 바우처를 발행하는 상황에서 중개 플랫폼이 독자적으로 현금 환불을 감당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이러한 시장 상황이 소비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법 위반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 법조계의 중론이다.
향후 온라인 여행 플랫폼을 이용하는 소비자들은 환불 규정을 꼼꼼히 확인하고 결제 수단에 따른 환급 원칙이 지켜지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플랫폼 기업들은 이번 제재를 계기로 자사의 약관과 환급 시스템이 국내 소비자 보호 표준에 부합하는지 전면적인 재점검을 실시해야 할 것이다. 공정위는 향후 유사한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위반 행위 적발 시 무관용 원칙으로 대응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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