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조창용 기자] 새누리당 정두언 의원은 "재벌이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이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돼 군사독재 이전보다 규모와 집중력이 커졌기 때문에 헌법조항 갖고 얘기할 상황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경제민주화 조항을 만든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은 "금융위기와 IMF 사태 당시 대기업은 정부에 의존해 국민 세금으로 살게 됐으면서 (이제와) 편안해지니까 시장원리를 이야기하는가"라며 "새누리당이 (재계 위주의) 사고를 해서 어려움을 겪다 비대위로 소생했는데 이제 다시 안이하게 돌아섰다"고 꼬집었다.
새누리당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의 5일 첫 토론회에서 친박근혜계 경제통 인사들이 현행 당론을 뛰어넘어 경제민주화에 근거한 재벌개혁 주장을 했다. 대선 국면에서 친박계 스스로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논의 전개에 대한 변화를 모색하는 행보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은 관련법을 이번 정기국회에 발의할 계획이지만 당내의 반발과 대기업의 반대논리에 막혀 '물타기'될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발제 제목에 '재벌개혁'을 내세운 친박계 이혜훈 최고위원은 경제민주화를 시장의 주축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될 수 있다(홍일표 의원)"는 반론이 나왔고 "재벌은 고삐 풀린 망아지(정두언 의원)"라는 재반박이 이어지는 등 논의는 뜨거웠다.
노동경제학을 전공했고 박근혜 전 비대위원장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소속 이종훈 의원은 재벌의 고용행태를 강도 높게 비판하며 비정규직 문제를 경제민주화 논의에 포함하자고 제안했다.
이날 주요 논쟁거리는 헌법 119조였다. 119조 1항의 '경제상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자유시장 조항과 2항의 '국가는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경제민주화 조항을 어떻게 조화시키느냐는 논의였다.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논의는 1항을 중심에 두고 2항으로 보완한다는 것이 주된 흐름이었다. 이한구 원내대표는 최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119조 2항이 1항을 앞서면 안 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이혜훈 최고위원은 "우리 헌법 1조1항은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을 선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경제민주화의 테두리 내에서 자유시장을 얘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훈 의원은 이에 대해 "1인1표인 민주주의 원리를 경제에 적용해보는 시도"라고 풀이했다.
그러면서 이혜훈 위원은 재벌개혁 정책으로 순환출자 규제,금산분리 강화,불공정 대기업 집단소송제 도입 등을 제안했다. 순환출자 규제와 금산분리 강화는 새누리당이 당론으로 반대했고 재벌의 불공정과 담합에 집단소송제를 도입하는 내용은 민주통합당조차 담지 못했던 파격적인 내용이다.
곧바로 반론이 등장했다. 판사 출신인 홍일표 의원(원내대변인)은 "헌법전문가들로서는 곤란한 이야기"라며 "민주주의는 정치의 관점에서, 시장경제는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한 것인데 민주주의가 허용하는 한에서 시장의 자유를 말한다면 이건 사회주의로 연결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이 최고위원은 "그렇게 본다고 해도 바로 사회주의로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맞받았다.
이른바 'MB노믹스' 입안자 가운데 한 명인 이만우 의원은 "경제민주화는 시장경제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시장을 보완하는 정도"라고 홍 의원을 거들었다.
이날 참석한 한 의원은 "경제민주화실천모임 의원 중 일부는 지난해 재계의 요구에 따라 임시투자세액공제 연장을 주장했던 사람들"이라면서 "입장이 뒤바뀌었는데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겠다"고 귀띔했다. 그러나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은 "유로존 위기로 정치권의 경제민주화 드라이브가 주춤할 수는 있으나 대선을 앞두고 있어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관련법안이 통과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회장 허창수)의 싱크탱크 격인 한국경제연구원(한경연)이 경제민주화의 근간이 되는 헌법 119조2항의 삭제를 주장했다. 4·11 총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이 화두로 떠올랐을 때는 반대 목소리를 자제했던 재계가 새누리당에 다수당 자리가 돌아간 19대 국회의 개원을 계기로 반경제민주화 움직임을 본격화하는 모습이다.
한경연은 지난 4일 오후 서울 태평로 한국언론회관에서 개최된 ‘경제민주화 어떻게 볼 것인가’를 주제로 한 정책토론회에서 발표한 ‘법적 측면에서 본 경제민주화의 한계’(신석훈 선임연구위원)에서 “시장(실패)에 대한 국가개입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라면서도 “(경제민주화 근거조항인) 헌법 119조2항은 해석상 혼란만 가중시키기 때문에 삭제하는 것이 좋다”고 주장했다. 한경연은 “자유시장경제 원칙을 밝힌 119조1항과 경제민주화 관련 119조2항은 원칙과 보완의 관계이기 때문에, 경제민주화 조항을 시장에 대한 국가개입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만능규범처럼 인식해서는 안 된다”며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정보장, 질서유지, 공공복리를 위해 제한할 수 있도록 한 헌법 37조2항으로도 정부가 시장개입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헌법 119조2항은 ‘국민경제의 균형 발전, 적정 소득분배, 시장 지배력 및 경제력 남용 방지, 경제주체간 조화를 위해 정부가 경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규정해, 경제민주화의 근거가 된다. 전경련 간부는 “재계가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헌법 119조2항의 폐기 주장을 내놓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경연은 헌법재판소가 우리나라 경제 질서로 설명하는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독일모델)에 대해서도 “사회적이라는 모호한 개념으로 인해 시장경제일 수 없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며 “독일에서도 국가의 강력한 개입을 허용함으로써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한경연은 또 “최근 정치권이 경제민주화 조항을 근거로 경제정책을 통한 성장과 사회정책을 통한 분배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경제성장을 위한 경제정책 담당 부분과 분배, 중소기업 보호를 위한 사회정책 담당 부분으로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경제민주화를 지지하는 법학자들은 한경연의 헌법 119조2항 폐지 주장에 반대한다. 이상영 방송통신대 교수(법학)는 “119조 1항과 2항은 주종의 관계가 아니라 대등하고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예를 들어 시장실패 상황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바로잡지 않으면 시장 자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독일에서도 사회적 시장경제질서를 말할 때 ‘사회적’과 ‘시장경제’는 주종이 아니라 대등한 관계로 해석한다”고 설명했다.
개혁진보성향의 경제학자들은 한경연의 발표는 재계에 경제민주화 의지가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김기원 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한국 경제의 문제는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실천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지, 과잉적용해서 생긴 게 아니다”라며 “재벌의 경제독재 체제를 바로잡는 것에 반대하고 계속 유지하겠다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또 시민단체들은 복지를 확대하더라도 양극화 심화를 초래하는 기존 성장전략을 고수하는 한 경제민주화를 이룰 수 없다며 경제-사회정책의 분리에 반대한다. 위평량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스가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 저소득층에게 분배하자고 주장한 것은 국민경제 전체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안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며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은 분리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경련은 19대 국회 개원을 맞아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관련 입법안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에 맞춰 반대 움직임을 본격화하고 있다. 전경련은 각 정당의 복지공약을 이행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분석한 내용과 대-중소기업 양극화가 대기업 책임이 아니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잇달아 발표할 계획이다. 한경연도 이날 토론회에서 정치권이 추진하는 대기업의 부당한 납품단가 감액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 등 하도급거래 개선정책과 중소기업 사업영역 보호 정책에 위헌 소지가 있다고 반대했다.
이에 대해 이현재(경기 하남) 새누리당 의원은 5일 전경련 산하기관인 한국경제연구원(한경련)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헌법 119조 2항의 삭제 주장이 제기된 데 대해 "시장 경제의 근간인 중소기업·소상공인을 비롯한 서민경제를 부정하는 편협한 주장"이라고 말했다.
중소기업청장을 지낸 이 의원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경제민주화의 근간인 헌법 119조 2항의 삭제 주장이 전경련의 공식입장인지, 한경련의 입장인지 모르겠지만 심히 유감"이라며 이같이 밝혔다.
그는 "날로 어려워져가는 서민경제와 민생을 먼저 챙기고 솔선수범해야 할 한경련 토론회에서 이같은 '반경제민주화'가 제기된 것은 오히려 반재벌 여론을 증폭시켜 '재벌개혁'이라는 역풍을 불러올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 의원은 이어 "우리나라 시장경제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힘의 집중과 남용에 있다"며 "시장에 집중된 힘이 존재하면 공정한 경쟁을 바탕으로 하는 시장경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헌법 119조 1항의 '자유시장원칙'과 2항 '경제민주화'는 주종관계가 아니라 대등하고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예를 들어 시장 실패 상황에서 정부가 시장에 개입해 바로잡지 않으면 시장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의원은 "시장경제 논리로 보면 IMF 시기에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해 대기업을 회생시키지 않았으면 대기업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우리 경제의 성장기반을 약화시키고 고용없는 성장, 비정규직 문제, 골목상권 붕괴라는 심각한 국가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은 경제민주화를 통해 가능하다는 것은 전경련을 비롯한 대기업이 인식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어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두가 공정하게 경쟁하는 시장경제의 기본을 갖추자는 것이 경제 민주화의 핵심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