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조영진 기자] 국내 철강업체 영업담당 임원들이 음식점이나 골프장에서 모여 판매 가격을 정하는 수법으로 짬짜미를 한 사실이 공정거래위원회에 무더기로 적발돼 과징금 폭탄을 얻어 맞았다.
공정위는 30일 강판 가격이나 아연할증료를 담합한 혐의로 코스코, 현대하이스코, 동부제철, 유니온스틸, 세아제강, 포스코강판, 세일철강 등 7개 업체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고 과징금 2917억3700만원을 부과했다고 밝혔다.
과징금 부과액이 가장 많은 곳은 포스코로 983억2600만원에 달했다. 이어 현대하이스코(752억9100만원), 동부제철(392억9400만원), 유니온스틸(319억7600만원), 세아제강(206억8900만원), 포스코강판(193억400만원), 세일철강(68억5700만원) 순이었다.
이 중 모 업체가 자진신고에 따른 과징금 면제(리니언시)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세일철강을 제외한 6개 업체를 검찰에 고발하기로 했다.
공정위 관계자는 "건재용 판재시장에서 냉ㆍ아연도, 컬러강판 제조사들이 수년간 가격 담합을 한 사실을 밝혀낸 첫 사례"라며 "앞으로도 경쟁을 제한하는 가격담합 행위에 대해선 과징금을 부과할 뿐 아니라 가담자를 검찰에 고발하는 등 엄중하게 제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공정위에 따르면, 포스코를 제외한 6개 업체의 영업 담당 임원들은 2004~2010년 서울 강남의 모 음식점이나 경기도 모 골프장에서 수시로 모여 냉연ㆍ아연도ㆍ컬러강판의 판매가격을 정했다. 공정위는 그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의심하고 있지만 물증을 확보하진 못했다.
가격 담합할 때 벤치마크는 철강업체 '맏형'인 포스코가 책정한 가격이었다.
'출혈 경쟁'을 피하기 위해 철강업계 절대 강자인 포스코가 냉연 또는 아연도강판의 가격을 변경하면 그에 맞춰 가격을 인상ㆍ인하했다.
시장 상황이 좋아 보이면 포스코가 올린 것보다 더 올리고, 내리는 게 불가피할 땐 인하폭을 최소화하기도 했다.
업체마다 생산하는 제품이 달라 담합에 참여한 업체도 제품별로 차이가 있었다.
이들은 주로 강남의 음식점이나 경기도 골프장에서 모였는데, 저녁 식사 모임의 경우 수첩의 해당 날짜란에 '동창', '소라회', '낚시회', '강남' 등으로 적었다. 업계 관계자들끼리의 모임이 문제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공정위는 설명했다. 혹시나 결석자가 있으면 논의 결과를 전화로 알려줬다.
임원들은 회사로 돌아가 모임에서 정해진 가격을 팀장에게 전달, 각 회사 팀장들이 모여 세부내용을 조정하고 실행계획을 세웠다. 팀장 모임은 냉ㆍ아연강판과 컬러강판 등 제품별로 구분됐다.
혹시나 짬짜미한 가격을 따르지 않고 '배신'한 업체가 없는지 수요처에 확인도 했다. 어떤 업체가 약속된 가격보다 낮게 팔고 있으면 그 업체가 항의하기도 했다.
냉연강판은 동부제철, 현대하이스코, 유니온스틸 등 3곳이 2005년 2월~2010년 5월 모두 11차례에 걸쳐 가격을 담합했다. 이들의 냉연강판 시장 점유율은 30%다.
아연도강판의 판매가격 담합엔 동부제철, 현대하이스코, 유니온스틸, 포스코강판 등 5곳이 참여했다. 2005년 2월~2010년 5월에 모두 10차례 동일하게 가격을 조정하기로 입을 맞췄다. 이들 업체의 시장점유율은 40%다.
컬러강판은 임원모임에 참여하는 6개사 모두가 짬짜미했다.
이들 업체는 컬러강판의 원재료인 열연코일을 생산하는 포스코가 열연코일 가격을 올리면 이를 제품 가격에 어느 정도 반영할지는 협의했을뿐 아니라 업체 간 할인경쟁 등으로 내려간 가격을 재차 올리는 담합을 하기도 했다.
컬러강판의 담합 횟수는 2004년 11월~2010 6월 16차례나 됐다. 이들은 컬러강판 시장의 90%를 차지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컬러 강판의 가격을 좌지우지한 셈이다.
포스코강판이 아연도강판 가격담합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을 빼곤, 이들 업체는 공정위 조사과정에서 담합 사실을 인정했다.
냉연강판에 아연을 도금한 아연도강판의 경우 '아연 할증료'라는 편법적 수단으로 원가 인상분을 수요처에 떠넘기기도 했다.
2006년 들어 아연 값이 2배 가까이 폭등했지만, 세계적으로 철광석 가격이 내린 탓에 아연도강판 가격이 약세를 보여 아연 가격 상승분을 제품에 반영하기 어려웠다.
이를 타개할 수법이 바로 아연할증료였다. 항공업계가 항공료와 별도로 항공유 가격에 따라 유류할증료를 매기는 것처럼 아연도강판 가격에서 아연분을 따로 떼어 아연의 국제가격 변동에 따라 아연할증료를 달리 받기로 한 것이다.
2006년 2월 아연할증료를 도입할 때 임원모임 멤버인 동부제철, 현대하이스코, 유니온스틸, 포스코강판뿐 아니라 포스코까지 가담했다고 공정위는 말했다.
2010년 2월엔 동부제철, 현대하이스코, 유니온스틸, 세아제강 등 4개사가 재차 아연할증료를 활용한 가격인상 담합을 했다.
포스코와 포스코강판은 이 같은 아연할증료 담합 사실을 강하게 부인하고 있으나, 모 업체의 문건과 타 아연도강판 제조사들의 일관된 진술로 포스코와 포스코강판의 담합사실이 드러났다고 공정위 측은 설명했다.
포스코 관계자는 이에 대해 "포스코는 아연도강판 시장점유율이 60% 이상이기 때문에 담합할 이유가 없다"며 "1차 담합 모임에 우리 회사 관계자가 참석하지 않았고, 모임에 참석했다고 알려진 인사는 당시 수출팀장으로 이 업무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허위 주장에 불과하다"고 담합 사실을 반박했다.
이어 "행정소송을 통해 무혐의를 입증할 것이며, 필요할 경우 담합 모임에 포스코가 회의에 참석했다고 주장한 모 업체 임원을 무고 혐의로 고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현대하이스코는 "관례적인 담당자 모임이 위법행위로 결론이 나서 당혹스럽지만 앞으로 유사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준법경영을 강화하겠다"며 "일단 공정위의 의결서를 받아본 뒤 향후 대응방향을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유니온스틸의 한 관계자는 "열연 코일을 구매해 강판을 만드는 하공정업체이기 때문에 매출 대비 3% 미만의 영업이익을 내고 있는데 이를 고스란히 과징금으로 내게 돼 경영 악화가 예상된다"며 울상을 지었다.
이 관계자는 이어 "경영난을 극복하기 위해 임직원들이 희망퇴직, 연봉 동결 등 뼈를 깎는 자구책을 시행하고 있는 상황인데 과징금의 규모가 너무 과하다"고 불만을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