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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생가터 비석 철거…일대기 425자

이완용 생가터 비석이 논란 끝에 결국 철거됐다.

28일 경기 성남문화원은 후대에 역사적 교훈을 전하기 위해 최근 설치했다가 적절성 논란이 불거진 매국노 이완용(1858~1926)의 생가터 비석을 철거했다고 밝혔다.

성남문화원은 이완용의 친일 행적을 알려 후대에 역사적 교훈을 전하고 경각심을 주자는 취지에서 지난 22일 백현동 이완용 생가터에 250만원을 들여 비석(가로 75㎝, 세로 112.5㎝)을 설치했다.

이완용 생가터 비석
▲ 이완용 생가터 비석. [연합뉴스 제공]

그러나 설치 의도와 달리 적절성 논란이 일자 설치한 지 1주일 만인 이날 오전 장비와 인력을 동원해 비석을 철거했다.

이 비석에는 이완용의 일대기가 425자로 담겨 있다.

내용을 보면 '이완용은 1858년 백현리에서 가난한 선비 이호석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9세 때 일가인 이호준에게 입양되었다'는 개인사로 시작한다.

이어 '시류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빠르게 변신하여, 을사5적이자 정미7적, 또 경술9적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고 새겨져 있다. '잠시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는 내용도 있다.

친일 행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를 영원한 스승으로 떠받들었으며 을사늑약 후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다. 고종의 양위, 한국 군대해산 등을 주도했고, 순종을 압박하여 한일합병에 앞장섰다'고 새겨져 있다.

이후에는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으면서도,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으로 있을 때 조선인 교육을 위한 학교비 납부를 끝까지 거부하였다'고 기록했다.

끝으로 비석에는 '이와 같은 매국적 행위로 인하여 독립운동가들의 암살 1급 대상자로 지목되었고, 결국 독립운동가 이재명의 습격을 받아 치명상을 입기도 했다'고 새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