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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신평사들 기업평가는 기업이 결정짓는다?

[재경일보 조동일 기자] 국내 신용평가사가 사실상 기업이 결정 지은 기업평가를 대외적으로 발표하는 무늬만의 신용평사가로 전락하고 있어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재 국내 기업들은 회사채를 발행할 때 두 곳의 신용평가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게 되어 있지만, 등급을 판정하는 신용평가사를 기업이 정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신평사가 `갑을 관계'에서 `을'의 입장이어서 신평사가 기업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신평사를 평가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된 것이다. 이 때문에 채권 투자자들은 국내 신용평가사의 등급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고 있다.

이런 가운데서도 정보가 부족한 개인투자자들에게 신용평가사들의 신용등급이 엄청난 손실을 줄 수 있기 때문에 국내 신평사들의 등급평가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시장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신용평가사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 국내 신평사 신용등급은 `붕어빵'

국내 신용평가사는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나이스신용평가 등 3대 신용평가사의 과점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이들 3대 신평사가 국내 주요 기업들을 평가하고 있지만, 칼자루는 이상하게 기업이 쥐고 있다. 기업이 3곳 중에서 2곳을 택해 신용등급을 받기 때문이다.

신평사들이 대기업의 신용평가에서 제외되면 수익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이런 약점을 잘 알고 있는 기업들은 '신용등급 쇼핑'이라는 이름으로 등급을 받기 전에 미리 3개의 평가사와 의견교환을 한다. 이 과정에서 기업들은 등급을 좋게 주는 평가사를 선택하며, 평가사 간 등급이 다를 경우에는 낮은 등급을 준 평가사에 등급 취소를 공공연하게 요청하기도 한다. 국내 3대 신평사의 신용등급이 `붕어빵'처럼 똑같은 이유다.

국제 신용평가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지난 2일 포스코의 장기기업신용등급과 채권등급을 A에서 A-로 강등했고, 무디스는 다음날 포스코의 신용등급 `A3'에 대한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무디스는 포스코건설의 신용등급도 현금흐름 악화와 실적 부진을 이유로 Baa1에서 Baa3으로 강등했다.

S&P는 또 지난달 14일 LG전자의 장기채권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내렸으며, 무디스는 전날 LG전자의 신용등급 Baa2에 대한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다.

하지만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이들 기업들에 대해서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고, 신용등급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는 다른 대부분의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삼성전자(AAA), 현대차(AA+), 기아차(AA), 현대모비스(AA), SK텔레콤(AAA), LG화학(AA+), LG유플러스(AA-),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AA), 하이닉스(A-) 등 국내 주요 기업에 대한 3대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은 모두 동일하다.

이는 삼성전자에 대해 무디스와 피치는 각각 같은 등급에 해당하는 `A1'과 `A+'를 줬지만, S&P는 한 등급 아래인 `A'를 부과한 것과 대조적이다. 기아차에도 S&P와 피치는 같은 등급인 `BBB'등급을, 무디스는 한 단계 아래인 `Baa3'을 각각 줬다.

이에 따라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사실상 신용등급을 밀약하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증권사의 한 관계자는 6일 "한 신평사가 등급을 조정하면 다른 신평사가 몇 시간 안으로 등급을 똑같이 맞추는 경우도 꽤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기업 신용등급 거품 심각

더 큰 문제는 국내 기업들의 신용등급이 실제보다 높은 거품이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다. 특히 건설, 조선, 해운은 신용등급과 실제 신용도의 불일치가 심각하다. 또 국내 신평사들은 기업들의 펀더멘털을 무시한 채 상향조정은 빨리 하면서 하향조정은 느리게 하고 있다. 하향조정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건설업의 수익성과 안정성, 현금흐름은 전체 평균보다 낮다. 지난 6월 말 현재 전체 `AA'등급 기업의 평균 영업이익률은 15.1%인데 비해 같은 등급의 건설업체는 3.7%다. 전체 `AA'등급 기업의 평균 부채비율은 101.1%인데, 건설업의 같은 등급은 130.6%다. 2007년 말 투자 가능 등급을 받았던 건설사 43곳 가운데 42%인 18곳이 부도에 이르렀다. 국내 신평사들의 신용등급에 거품이 얼마나 끼어 있는 지를 알 수있다.

조선업도 최근 3년간 수익성, 안정성, 현금흐름이 모두 나빠졌지만 국내 신평사들은 등급에 손을 대지 않고 있다. 실적 악화와 선박투자 부담으로 재무지표가 악화할 게 분명한데도 요지부동이다. 지난 3년간 법정관리를 신청한 대한해운을 제외하고는 유코카캐리어스, 한진해운, 현대상선, STX팬오션, SK해운 등 해운업체 5개사의 신용등급이 A로 유지되고 있다.

국내 신평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면 이로 인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투자자들이다. 신용등급은 채권투자자뿐만 아니라 주식투자자에게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난 1월 대한해운이 법정관리를 신청했을 때 국내 3대 신평사가 대한해운에 적용했던 신용등급은 `BBB+'였다. 하지만 이 회사는 법정관리 신청 불과 한 달 전에 866억원의 유상증자를 했다. 이런 것을 국내 신평사는 신용등급에 전혀 반영하지 않았다.

최근 3분기 실적악화와 유상증자 등으로 주가가 폭락한 LG전자도 대표적 사례다. 국제 신용평가사가 선제로 이 회사의 등급을 내리면서 이 같은 위험을 경고했지만, 국내 신평사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고 결국 국내 개미투자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보게 됐다. S&P가 LG전자의 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한 지난달 14일 이후 LG전자의 주가가 7만3천원에서 6만1천10원으로 떨어지는 동안 외국인투자자는 82억원어치를 순매도했지만, 개인투자자들은 오히려 263억원어치를 순매수했다.
 
◇ 신평사 "국제ㆍ국내 기준 다르다" 반박

국내신용평가사들은 신용평가를 할 때 국제와 국내 기준이 다르다고 해명했다. 국내외 신평사가 평가방식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시각도 같지 않다는 주장이다.

한기평 관계자는 "국제 신용평가사와 국내 신용평가사는 등급체계가 다르고, 방법론에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무디스는 재무지표가 바뀌면 등급을 조정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제 등급체계는 부도확률에 기반을 둔 절대적 등급체계로 국가 간 비교가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반면에, 국내 등급 체계는 특정국가 내에서 업체나 금융채무의 상대적 신용도에 관한 의견으로 해당 국가 내에서만 사용되도록 고안된 등급체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다른 국가의 국내 등급과는 원천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고 한기평은 설명했다.

피경원 나이스신용평가 기획실장은 "신평사마다 시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국제신평사가 내린다고 해서 우리가 하향 조정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지나치다. 실적 저하가 있더라도 펀더멘털에 큰 변화가 없으면 등급조정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펀더멘털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다.

한 자산운용사의 채권운용본부장은 "연구원들이 펀더멘털을 토대로 평가하려 해도 윗선에서 어떤 등급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사전에 기업과 합의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상황에서 펀더멘털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질 리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신평사 인력도 국제 신평사에 비해 떨어진다. 국내 3개 신평사들이 과점해 나눠 먹는 체계이기 때문에 경쟁도 없고 변하려는 의지도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