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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감시시스템 `총체적 부실'로 투자자만 피해

[재경일보 조동일 기자] 경제의 핵심인 기업이 무너지면 경제 전체가 흔들리고 국민들이 큰 타격을 입기 때문에 모든 정부는 기업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엄정하게 감시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우리 정부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에 관련 제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 대주주와 경영진의 전횡을 막고자 사외이사와 감사제도를 정비했고 회계법인들이 기업의 재무상태를 정확히 평가할 수 있도록 여러 문제점을 개선했다. 또 기업들에 대한 신용평가 강화를 통해 기업들의 신용상태를 투자자들에게 정확히 알리도록 했고, 증권사 분석가들도 객관적 투자의견을 과감하게 내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정부가 만든 이러한 시스템은 지금 거의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어 기업 감시에 있어서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됐다. 신평사들은 기업들의 눈치를 보느라 등급을 제대로 산정하지 못하고 있고, 회계법인과 증권사도 이해관계에 얽매여 객관적인 분석과 감사 결과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거수기'로 전락한 사외이사와 감사는 해당 기업을 견제하기는커녕 비리와 문제점을 감싸고 돌기에 급급한 보호막이 됐다.

문제는 이런 감시기관들의 `직무유기'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자체적인 정보 수집과 분석, 평가능력을 갖춘 기관투자가들은 위험을 회피할 수 있으나, 이런 부분에서 취약한 일반 투자자들은 뒤늦게 위험 정보를 접하는 만큼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 신평사들 제기능 못하면 `재앙'

신평사들은 중요한 기업 감시 시스템 중 하나다. 무디스, 피치, S&P 등 3대 국제 신용평가사는 내놓는 신용등급 평가는 전 세계를 들고 놓을 정도의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는 너무나 영향력이 막강해진 이들 신평사들을 상대로 국가가 조사에 착수하기도 한 상태다. 이러한 신평사들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 큰 문제를 가져온다. 2008년 미국에서 발생한 서브프라임모기지 부실 사태의 핵심 요인 중 하나가 신평사들이 채권에 대한 신용평가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었다.

동양종금증권은 최근 펴낸 `채권 백서'를 통해 "핵무기보다 위험한 것이 신용등급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신용등급은 중요하다. 잘못된 등급은 심각한 재앙을 불러온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국내 신평사들이 내놓는 신용등급은 이미 시장에서의 권위를 잃어버린 지 오래됐다. 기업들의 신용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업에 낮은 등급을 적용해 기업들로부터 외면당하면 수수료가 많이 줄어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기업들이 원하는대로 좋은 평가를 남발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국내 신평사들의 치부를 알지 못하고 이들의 신용등급을 신뢰하는 개인투자자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투자증권 관계자는 6일 "국내 신평사들은 지나치게 관대한 신용등급 부여로 신뢰가 추락한지 이미 오래됐다. 게다가 대한해운, 진흥기업, LIG건설 등에 대한 안이한 판단을 내려 문제를 초래한 적도 있다. 최종 협상이 진행 중인 삼부토건에 대한 면피성 신용등급 하향조정으로 협상에 타격을 줬던 일도 있다"고 전했다.

◇ 회계법인도 기업 앞에 무기력

회계법인들은 해당 기업의 재무상태를 정확히 파악해 투자자들에게 알려 부실 기업에 대한 투자로 피해를 보지 않도록 해야 하지만, 기업들의 입맛에 맞게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3월에는 한 회계법인이 `의견거절'로 결론이 난 감사의견을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적정'으로 바꿨다며 협박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개별 기업이 회계 감사인을 직접 선정하는 현재 구조에서는 기업과 회계법인의 유착에 의한 부정의 소지가 다분하다는 지적이다.

한 회계법인의 관계자는 "특정 회계법인이나 회계사가 해당 기업을 수년간 계속해서 감사하는 현실에서 회사 측과 유착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거액의 감사료를 주면서 입맛에 맞게 해달라고 주문하면 감사인은 요구에 따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또 현실적으로 회사가 고의로 재무제표를 조작하면 감사인이 밝혀내기 어렵다는 문제도 있다. 감독 당국도 문제가 불거지면 사후 대응할 수밖에 없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회계감사는 시장논리만으로 이뤄지지않는 구조로 돼 있다. 정밀한 감사를 하려면 더 많은 시간과 인원이 필요하다. 기업으로서는 회계법인에 더 많은 회계보수를 지급해야 한다. 기업의 입장에서 정밀 감사를 선호할 리가 없다"고 말했다.

김문철 경희대 교수는 "감사인 품질관리제도를 강화해야 한다. 투자자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상장법인과 금융기관에 대해 감독 당국이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런 가운데 최근 국내에 상장된 중국 기업들의 회계 불투명성이 논란이 됐지만, 국내 기업의 회계감사에서도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금융감독원의 감리 결과를 보면, 재무제표 및 감사보고서와 관련된 규정 위반 지적 건수는 2009년 78건에서 작년 151건으로 급증한 것으로 6일 확인됐다. 기업당 평균 지적건수도 1.18건에서 1.89건으로 늘었다.

위반 유형별로는 자산 과대계상, 대손충당금 과소계상 등을 통한 당기손익 과대계상이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2009년 41건이었으며 작년에는 96건에 달했다.

표본감리에서도 위반사항 지적건수가 해마다 늘었다. 표본감리를 통한 지적은 2008년 17건, 2009년 24건, 작년 38건으로 증가세를 보였다.

일반인 투자자 비중이 높은 코스닥 상장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지적된 기업 중 코스닥 상장사는 2008년 76.5%에서 작년 89.5%로 뛰었다. 회사나 감사인에 대해 과징금 부과나 회계사 업무정지 등 무거운 조처를 내린 사례도 매년 증가하고 있다.

올해에도 회계처리기준을 위반해 재무제표를 작성, 공시한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한 건설사는 대표이사가 금융기관으로부터 19억원을 차입할 수 있도록 회사의 정기예금을 담보로 제공했지만 이를 기재하지 않아 제재를 받았다.

한 회계법인은 프로젝트파이낸싱(PF) 대출 매각과 관련한 대손충당금을 회사 측이 과소계상한 사실을 감사의견에 적절히 반영하지 않아 감사업무 제한 조치를 받았다.

◇사외이사ㆍ증권분석도 유명무실

대주주와 경영진의 견제가 주요 임무인 사외이사와 감사도 `거수기'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은 지 오래다.

사외이사들은 최대 1억원 가량의 연봉을 받고도 대주주 견제와 비판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대주주의 입김으로 선임된 사외이사와 감사들에 의해 소액주주의 권리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투자자들에게 정확한 기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증권사들도 기업에 부정적인 보고서는 좀처럼 내지 못하고 있다. `매도' 의견은 찾아보기 어렵고 `매수'를 권고하는 보고서가 대부분이다.

한 증권사의 임원은 "보고서를 부정적으로 쓰면 회사에 애널리스트를 출입하지 못하게 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주지 않고 소외시키기도 한다. 불이익을 피하려고 매도를 권하는 보고서를 못 쓰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상대적으로 정보력이 부족한 일반 투자자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