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전재민 기자] 국제 신용평가사들이 3분기 들어 경영실적이 악화되고 글로벌 경기 침체 등의 영향을 받고 있는 국내 일부 대기업의 신용등급을 내리고 있지만,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등급조정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6일 KIS채권평가와 동양종금증권, 신용평가기관 등에 따르면, 2008년 이후 한국기업평가, 한국신용평가, 나이스신용평가 등 국내 3대 신용평가사의 평가 대상 기업수(금융사 제외)는 지난 6월 말 현재 370곳으로 2007년 말 406곳보다 11.5% 줄었지만 AA등급은 39곳에서 80곳으로 두 배 수준으로 불어났다. A등급도 100곳에서 123곳으로 23% 늘어났다. 반면, 상대적으로 낮은 등급인 BBB등급은 105곳에서 66곳으로, 투기등급인 BB 이하는 154곳에서 93곳으로 각각 급감했다.
지난해 국내 신평사들은 투자 가능 등급인 BBB 이상의 기업 중 모두 75개사의 신용등급을 올렸으나, 등급을 내린 곳은 전혀 없었다. 올해 들어 3분기까지 신용등급 상향조정은 31개사, 하향조정은 4개사로 심한 불균형 상태다.
문제는 우량등급 기업들의 재무상태가 좋아진 것도 아닌데도 평가 등급은 상승했다는 것이다.
영업현금흐름(OCF)을 부채로 나눈 비율을 보면, 지난 6월 말 현재 AAA등급은 23.5%로 2007년의 37.9%보다 14.4%포인트 떨어졌다. AA등급은 21.9%에서 18.4%로, A등급은 19.6%에서 7.1%로 각각 낮아졌다.
국내 신평사들과 달리 국제 신평사들은 한국의 간판급 대기업의 등급을 과감하게 내렸다.
지난 2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포스코의 장기기업신용등급과 채권등급을 A에서 A-로 강등했고, 무디스는 다음날 포스코의 신용등급 `A3'에 대한 전망을 `안정적'에서 `부정적'으로 조정했다.
S&P는 지난달 14일 LG전자의 장기채권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로 내렸으며, 무디스는 전날 LG전자의 신용등급 Baa2에 대한 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조정했다.
하지만 국내 신평사들은 포스코에 AAA, LG전자에 AA 등 최고 수준의 등급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나이스신용평가 관계자는 "아직 실적 저조가 펀더멘털(기초여건) 악화로 이어지지 않아 등급조정을 안 했다. 국내외 시각차도 있으며 신평사별로 입장이 다를 수 있다"고 말했지만, 신평사들이 기업들의 신용도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특히 조선, 해운, 건설 등 재무상태가 악화되고 있는 업종의 기업의 신용등급을 조정하지 않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현재 해운업체들은 선진국 경기 둔화로 인한 실적악화와 선박투자 부담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대상선은 올해 들어 3분기까지 수천억 원의 적자를 기록했으며, 2분기 1천700억원의 적자를 기록한 한진해운은 심지어 임원들이 급여를 10% 반납하기로 했다. 업체별로 선박투자 부담에 따른 재무지표도 나빠진 데다 앞으로 전망도 좋지 않다. 하지만 지난 3년간 한진해운, 현대상선, STX팬오션, SK오션, 유코카캐리어스 등 5개사의 신용등급은 모두 A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신평사 외에도 기업을 감시하고 평가해야 하는 국내 시스템은 곳곳에서 먹통 상태다. 기업의 사외이사와 감사는 이미 대주주와 경영진의 '거수기'와 `바람막이'로 전락한 지 오래됐고, 회계법인들은 기업들의 요구에 맞춰 재무상태를 평가하고 있다. 회계법인의 한 회계사는 "기업에서 감사료를 주니 입맛에 맞게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경우가 많다"며 "회계감사 결과가 `의견거절' 수준으로 심각하지 않으면 적당한 선에서 기업의 요구에 맞춰준다"고 말했다.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는 증권사의 애널리스트도 `매도' 의견을 주저한다. 그래서 증권사의 보고서에 대한 신뢰는 이미 땅에 떨어진 상태다.
이 때문에 기업에 대한 우리나라의 감시 시스템이 사실상 완전히 붕괴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의 이시연 연구원은 "한국에서는 기업 감시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 회계법인도 문제가 많고 신용평가사들도 제 기능을 못하고 있다. 사외이사들과 감사는 거수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