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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 사망한 노무현(盧武鉉,63) 전 대통령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여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노판석(盧判石)씨와 이순례(李順禮)씨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한 그는 66년 10월에 고졸 출신에게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 시험’에 합격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는 기간 중 군 생활과 결혼을 했다. 그는 1968년에 군에 입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한 뒤 1971년에 상병으로 만기 제대해 1973년 1월, 마을에서 알고 지낸 권양숙씨와 결혼해 아들 건호씨와 딸 정연씨를 낳았다.
막노동을 해가며 준비한 끝에 1975년 제 17회 사법고시에 합격했고 2년간의 연수원 생활을 거친 후 1977년 대전지방법원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스스로 그만두고 1978년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했다.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운동을 탄압한 '부림 사건(釜林事件)' 이후 그는 시국 사건, 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 변론에 치중했고, 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고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리는 등 재야운동에 나섰다.
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를 거의 중지하다시피 하고 운동에 전념하여 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 항쟁’의 주역이 되었다.
1988년 13대 총선 당시 부산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초선의원시절에는 '제5공화국 비리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전두환 전 대통령을 향해 명패를 집어던지기도 하는 등 '청문회 스타'로 각광받으며 활동했다.
이후 14대 총선(1992년), 부산광역시장 선거(1995년), 15대 총선(1996년)에 출마했지만 모두 낙선했다.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연이은 출마에 사람들로부터 '바보 노무현'으로 불리기도 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이후 노 전 대통령은 2000~2001년 해양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민주화 세력을 기반으로 노 전 대통령은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특히 투표 당시 '노사모' 등 팬클럽의 등장에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대통령 당선이후에도 시련의 시기는 그치지 않았다. 2003년 2월 판사출신 강금실 변호사를 법무부 장관에 임명한 뒤 검찰의 불만에 평검사와의 대화를 마련했지만 오히려 불신이 깊어졌다.
이어 선거법 중립 의무 위반, 경제 파탄, 측근 비리 등의 이유로 16대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2004년 3월12일부터 5월14일까지 63일동안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기도 했다.
재임 기간 중 386세대 측근 안희정씨와 최도술씨 등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검찰에 구속 수감됐다. 청와대에서 집사로 통했던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또한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받은 3억원과 노 전 대통령 특수활동비 12억5000만원을 빼돌린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가족들 역시 비리연루 의혹에 휘말려 검찰에 소환됐다. 2008년 12월 형 노건평씨가 세종캐피탈 대표 홍기옥씨(59,구속)로부터 농협중앙회가 세종증권을 인수하도록 정대근 당시 농협 회장에게 청탁해 달라는 명목으로 29억6300만원을 받아 구속수감됐다.
노 전 대통령의 부인 권양숙 여사와 아들 노건호씨는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아 대통령 가족이 검찰에 소환되는 불명예를 남기기도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재임 중 박연차 태광실업 회장으로부터 600만 달러의 '포괄적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피의자 신분으로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에 이어 역대 대통령으로는 세 번째로 검찰에 출석했다.
이후 조만간 검찰의 재소환을 앞두고 23일 오전 6시50분께 경남 김해 봉하마을 자택 뒷산 언덕에서 투신, 뇌출혈상태에서 병원에 이송돼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끝내 사망했다. (사진=사법연수원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 모습/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