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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세대교체기 맞아 펀드·옵션 등 파생상품 이용 편법·탈법 증여 극성

[재경일보 이호영 기자] 기업들이 경영권 세대교체기에 접어들면서 세금을 안 내거나 덜 내면서 부를 대물림하려는 지능화된 편법·탈법 증여 수법이 갈수록 극성을 부리고 있다.

조세피난처를 이용한 변칙적인 국제거래는 기본이고 펀드나 옵션 등 파생상품시장까지 탈세의 수법으로 활용하고 있어 세무당국이 이들 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국세청은 13일 10개 중견기업에 대해 상속·증여세 회피 목적의 편법 증여를 시도한 것으로 의심돼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이들 기업은 경영권 승계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회사들이다.

세무당국에 따르면, 대기업은 창업 2세대에서 3세대로, 중견기업은 1세대에서 2세대로 경영권이 넘어가는 세대교체 과정에서 거액의 상속·증여세를 피하려는 탈법·편법이 속출하고 있다.

올해 상반기 한 중견기업은 대주주가 조세피난처에 자녀 명의로 해외 펀드를 만들고 국내 관계사 주식을 저가로 양도해 세금 부담 없이 경영권을 물려주다 과세당국에 적발됐다.

변칙적인 국제거래를 이용해 자금을 해외에 조성ㆍ은닉하고 이를 자녀에게 증여한 사례도 있었다.

또 아버지가 사망 전에 다른 사람에게 명의신탁한 주식을 매각해 해외 유령업체에 송금한 뒤 외국에서 아들 명의로 자금을 세탁하고 상속세를 신고 누락한 사례도 적발됐다.

이처럼 상속·증여세에 대한 세무당국의 감시가 강화되자 최근에는 펀드·옵션 등 파생상품시장이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 창구로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파생상품시장은 거액의 손실이나 수익이 나는 경우가 흔해서 금융감독당국이나 세무당국의 감시망에서 벗어나기가 상대적으로 쉽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수법은 증여자와 증여를 받는 자 사이에 사전 협의를 한 후 비정상적인 가격에 옵션거래를 하는 방식으로, 증여자는 많은 돈을 잃는 대신, 증여를 받는 자는 거금을 벌 수 있다. 특히 시장이 출렁일 때 증여자가 옵션 가격을 조금만 조정해도 증여를 받는 자가 이익을 보기 때문에 비용도 적게 든다.

옵션가격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들지만 시장이 출렁이는 것을 활용해 기술적으로 조정하면 10% 가량의 비용만으로도 증여가 가능하다. 상속증여세율이 최고 50%나 되는 것에 비하면 비용이 훨씬 적게 들기 때문에 기업들의 증여 수단이 되고 있다.

파생상품 시장 외에 사모펀드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사모펀드는 공시 의무가 거의 없어서 베일에 가려진다는 이점이 있다. 증여받을 자와 증여하는 자가 사모펀드에 가입한 뒤 수익이 날 경우 90일 내에 환매하면 투자수익의 70%는 펀드에 귀속된다는 규정을 활용하는 수법이다.

관계 당국은 국내 기업 수장들이 점차 고령화되고 있어 앞으로 다양한 방법으로의 편법 대물림이 앞으로 더 극성을 부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경영 월간지 `현대경영'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으로 국내 100대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평균 연령은 58.9세로, 이 잡지의 조사가 시작된 1994년 이래 최고령인 것으로 나타났다.

CEO 가운데 신격호 롯데쇼핑 회장이 89세로 나이가 가장 많았고, 조석래 효성 회장(76세), 손경식 CJ제일제당 회장(74세),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73세)도 70대가 넘는 `고령 CEO'에 이름을 올렸다.

중견기업들도 CEO 고령화 현상에서 예외는 아니어서 코스닥협회 조사 결과, 코스닥 상장기업 CEO들의 평균 연령은 지난 6월 말 현재 53.2세로 2006년 50.1세에서 3세 이상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CEO들의 고령화로 경영권 세대교체가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면서 2세대, 3세대에게 `가업'을 물려주는 움직임도 속도를 내고 있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주식시장에서 `어린이 주식부자'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국내 상장기업 대주주 자녀나 친인척 가운데 보유 주식 가치가 1억원 이상인 만 12세 미만 어린이는 2008년 5월 51명에서 올해 같은 달에는 87명으로 늘었다. 억대 지분을 가진 어린이 주식부자가 3년만에 70% 이상 증가한 것이다. 이들 어린이 중에는 재벌그룹 가문 손자녀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다.

기업 수장들이 부를 대물림하는 수단으로 주식을 선호하는 이유는 다른 자산에 비해 상속·증여세를 줄이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주식은 한번 대물림되면 나중에 가치가 몇 배로 불어나도 추가로 세금을 낼 필요가 없다. 주가가 폭락했을 때 자녀에게 주식을 물려주면 절세 효과는 더 커진다. 문제는 `절세' 욕구가 지나치면 `탈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과도한 상속세가 기업 부담을 가중시킬 뿐 아니라 탈세를 부추기고 있기 때문에 이를 완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가업상속공제율과 한도를 높이는 것을 골자로 하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이 추진 중인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그러나 공정한 자본주의 경쟁 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상속ㆍ증여에 대해서는 엄격한 과세가 필요한 만큼 이를 완화해서는 안된다는 주장도 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고계현 사무총장은 "부의 대물림이 만연하면 치열한 경쟁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다는 기대도 사라져 자본주의의 활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내 기업가들은 워런 버핏과 같은 미국의 거부(巨富)들이 스스로 부자들에 대한 증세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