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뮤지컬계에 빼놓을 수 없는 하나의 큰 화제가 있다면 바로 창작뮤지컬 '영웅'이 아닐까. 1995년 명성황후 시해 100년을 맞아 뮤지컬 '명성황후'를 선보였던 연출가 윤호진이 3년여의 시간을 투자해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삶과 우리 역사를 재조명하는 '영웅'을 펼쳐냈다.
달리는 기차소리와 일곱발의 총성… 높다란 측백나무 숲. 러시아 연해주 타국의 하늘 아래 조선 청년 12명이 모여 네번 째 손가락을 잘라 결의하던 단지동맹을 맺는 장면으로 뮤지컬 '영웅'이 시작한다.
이번 뮤지컬은 초연임에도 탄탄한 짜임새는 물론 안중근 의사 서거 100주년 기념작답게 먼저 웅장한 스케일과 화려한 연출이 눈길을 사로잡으며 관객들을 100년 전 그때 그곳으로 끌고간다.
윤호진 연출은 뮤지컬 '영웅'을 통해 1909년 2월 안중근이 러시아 연추에서 동료들과 가진 단지동맹부터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이 이루어지기까지 모습을 담아냈다.
극은 안중근을 무결점의 완벽한 영웅인물로 묘사하거나 억지로 그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의 애국심을 상투적으로 쥐어짜듯 꺼내 보이지 않았음에도 관객의 심금은 이미 ‘조국’에 맞닿아 있다. 호소력 짙은 보컬, 실존을 방불케 하는 강렬한 눈빛 연기를 선보인 류정한의 호연과 조연들 연기가 관객을 조국애로 몰입시키기에 충분했다.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 우덕순 등 실존 인물 외에 링링, 설희, 김내관 등 가상의 인물도 내세웠다. 설희는 명성황후 시해 참상을 목격한 궁녀로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 게이샤가 돼 이토 히로부미를 유혹하는 여인이지만 그 와중에도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인간적인 애정을 느끼는 인물. 링링은 안중근의 중국인 친구 왕웨이(역시 가상인물)의 여동생으로 16살 꽃다운 소녀. 설희와 링링은 모두 안중근을 사모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안중근은 당시 아내가 있었으며 둘 사이에 2남1녀를 둔 아빠. 아내 대신 링링, 설희라는 가상의 인물을 내세운 것에 대해 역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봤을 때 어떻게 이해할 지, 오해가 가지 않을지 의심되는 부분도 있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배우들의 절제되고 깔끔한 연기와 안정된 목소리, 관객과 호흡하려는 성의 등 열연이 돋보였지만 이것보다 무대 미술이 시종 관객을 압도한다. 그만큼 무대 미술과 연출이 최고의 작품이다. 수평과 수직의 평면에 입체감을 불어넣는 화면과 사다리와 같은 소품 사용으로 시공을 적절히 표현했다. 흩날리는 눈발과 무대를 꽉 채운 기차는 살아움직이는듯한 생동감으로 관객들을 숨막히게 했다. 특히 오방색 조명의 사용으로 안중근 장면은 푸른 빛으로, 이토 장면은 붉은색과 보라색으로 하는 등 동양적 미와 캐릭터의 특성을 함께 표현하는 절묘함이 돋보였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토 히로부미의 사살 장면. 많은 이가 숨죽이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하얼빈 역에서의 이토 사살 장면은 세 방의 총성과 함께 순식간에 지나갔다.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장면이라든지 총격 후 혼란스런 기차역 장면이라든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 어떤 것도 없이 일순간에 끝나 오히려 절제미를 더하며 긴 여운을 남긴다.
한편, 이 극의 절정은 이토의 죽음이라기보다는 안중근의 죽음이다. 안중근을 인간 안중근으로 묘사한 장면들이 더욱 세세하게 펼쳐지기 때문이다. 두려움 앞에서 떨고 있는 모습,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 흘리는 여느 아들과 같은 연약한 모습, 두려움을 벗어나게 해달라고 천주께 간절히 기도하는 이 땅의 한 작은 인간의 모습. 이후 안중근이 어머니가 지어 보낸 수의를 입고 사형대에 오르는 장면에서는 눈물을 훔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지막 장면이 끝나자 관객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나가려는 것이 아니라 기립박수를 치기 위해서다. 커튼콜이 모두 끝날 때까지 관객 대부분이 자리를 뜨지 않고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안중근에 대해, 배우들의 열연에 대해, 그리고 손에 잡히지 않는 조국에 대해. 수 많은 관객들이 연신 두 볼에 흐르는 ‘감격’을 훔쳐냈다.
뮤지컬 '영웅'이 안중근을 되살리는데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이 역사인물을 다시 보고 다시 떠올리며 단순한 민족주의나 협애한 역사의식이 아닌 현실과 어떻게 접목시키고 승화시킬 것인지, 우리 모두의 과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시 시작 후에는 관람객 입장을 제한한다고 방송까지 해 놓고 공연 10여분이 지난 후까지 들여보낸 것이 옥의 티. 이들을 인정(人情)으로 계속 들여보내야 하는지, 아니면 이참에 공연문화를 올곧이 세울 것인지 찰나의 고민이 극의 집중을 방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