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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염쟁이 유씨’ 죽음을 통해 삶을 재조명하다

죽음의 다양한 형태

언젠가 전 세계적으로 1초에 18명이 태어나고 또한 매초 4~5명이 사망한다는 소식을 접한 적 있다. 자기 수명을 다 하고 죽는 사람,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사람, 질병으로 사망하는 사람, 여러 가지 어려움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의문사를 당해 억울하게 죽는 사람, 위험에 처한 다른 이를 구하려다 소중한 내 목숨을 잃게 되는 사람, 심지어는 낙태로 혹은 출산시 사망하는 신생아 등등... 그야말로 죽음도 다양하다.

요즘은 신종플루다 뭐다 민심도 숭숭하고 날씨도 갑작스레 추워져 마음마저 꽁꽁 얼어붙을 거 같은데 죽음에 대해서 구구절절 늘어놓으니 기분 아주 별로인가? 그러나 사람이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니 우리 어찌 죽음에 대해서 생각지 않을 수 있을랴.

얼마 전 죽음을 소재로 한 모노드라마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 보았다. 대학로 한 극장, 별로 크지 않은 공간, 배우 유순웅이 1인 15역을 소화하며 죽음의 다양한 형태에 대하여, 죽은 사람에 대한 지인과 친인척들의 각각의 반응에 대하여, 사람이 죽은 후 염습 절차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다루면서 때로는 유쾌한 웃음을, 때로는 씁쓸한 웃음을, 때로는 애잔한 눈물을, 때로는 깊은 사색을 이끌어냈다.

극 중 염쟁이 유 씨는 노환으로 돌아간 아버지의 시체를 염습하면서 그렇게 도망가려고 했던 가업을 잇게 됐으며 결국 험한 세상에서 사기당하고 상처받은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 아들의 시체까지 염습하는 극한 상황을 맞이한다. 그러면서 유 씨는 "죽음은 생명이 끊나는 것이지만 인연은 남는 거란다.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힘든 거란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 유순웅이 유씨의 아버지로 분한 모습
▲ 유순웅이 유씨의 아버지로 분한 모습

어떤 이름으로 남을 것인가?

속담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태어나 어떻게 살아야 좋은 이름, 아름다운 이름, 오래 기억되는 이름으로 남을까'라고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법하다.

사는 게 힘들다고 하는데 왜 사람들은 더 살고자 아둥바둥일까? 오히려 죽는 게 더 낫지 않느냐는 생각이 한순간 스쳐지나갔다. 이 같은 생각을 하는 이에게 생명은 소중한 거라서 함부로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 사느냐에 대해 묻는다면 어떤 이는 '죽지 못해서 산다'고, 어떤 이는 '이왕 태어났으니 그냥 사는거'라고, 어떤 이는 '더 큰 권력과 부와 명예를 위해서'라고, 어떤 이는 '덜 살아봤으니 더 살아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어떤 이는 '못해 본 것이 너무 많아서 그냥 포기하기에는 아쉬움이 남는거'라고, 어떤 이는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는 가족을 위해 사는 거'라고... 여하튼 사람들은 수많은 존재의 이유를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를 고민할 때 연극 '염쟁이 유씨'는 죽음과 염습에 대해 다루며, 이를 통해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 유씨와 동업해 돈 벌려는 '장사치' 역으로
▲ 유씨와 동업해 돈 벌려는 '장사치' 역으로

죽음도 예비해야 한다?!

극 중 유씨가 한 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만약 어르신이 환갑이 지나 관을 사신다거나 수의를 마련하신다면 뭐라 하지 마라. 죽음을 준비하는 것은 남은 인생 더 잘 살아보겠다는 다른 표현이다"

나 같은 경우 죽음에 대해 별로 생각해본 적 없다. 힘들어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은 해봤지만, 심각하게 진지하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인생의 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주위에서 가족이나 친척, 지인의 죽음을 경험한 적 없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죽음은 나와 상관 없는 것이라고, 나는 이렇게 일찍, 그리고 갑작스레 죽지 않을 것이라는 방심(?) 때문이 아닐까.

'염쟁이 유씨'를 보고 나니 아름다운 죽음, 평안하고 유감이 남지 않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생각이 샘솟았다. 그러한 죽음을 맞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내 전 인생을 들여 찾고 완성해야 할 하나의 거대한 과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