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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만 조금이라도 일찍 가게 문을 열고 장사를 했으면 한다. 내 관심은 거기에 있다. 청소년이 술을 달라고 하면 약간 미심쩍기는 하지만 술을 팔고 매상을 올려야 한다. 오늘도 외국산 소고기를 들여와 마치 국산인 것처럼 해서 팔아야 뭐 좀 남는다. 노래방에서 노래만 부르게 하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다. 얼른 맥주, 소주, 양주를 팔아야 많이 남는다. 팔다가 걸리면 손을 써서 영업정지보다는 과징금을 맞고 끝내야 한다. 유통기한이 넘긴 식재료는 빨리 사용하여야 한다. 버리면 아깝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서는 적재화물량을 넘는 화물도 실어야 한다. 최근 3년간 과적차량을 적발된 차량 대수는 15만6,000대로 연간 약5만2,000대 정도이고, 부과된 과태료는 3년간 약872억원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적을 한다.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약간의 위법이라 생각되는 것은 어길 생각이다. 그렇게 돈을 벌어야 내 자식이 수학여행이라도 갈 수 있다. 세월호 과적과 내 화물차의 과적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내 자식이 타고 가는 수학여행 배는 절대 침몰하지 않을 것이다.
돈을 조금 아끼기 위해서는 굳이 대리운전으로 차를 집에 까지 가지고 갈 이유가 없다. 내가 조심조심 운전하면 사고는 나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음주운전을 한 것과 음주운전을 하지 않은 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다.
유민이 아빠가 30일을 넘게 단식을 해도, 내가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사회는 내가 노력하는 만큼 나에게 돌려주는 사회 아닌가?
우리 사회는 언제부턴가 이와 같이 각자 사는 사회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처음부터 각자 사는 사회는 아니었다. 1960년 4월 마산 앞바다에서 실종되었던 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우리 사회가 각자 사는 사회이었다면 4. 19.혁명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4. 19.혁명은 우리가 함께 사는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1987년 6월 민주화 운동은 경찰에 의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밝혀졌을 때, 우리 사회가 각자 사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에 의해 개헌이 이루어 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어느새 변해버렸다. 나와 같은 40, 50대는 가지고 있는 집의 가격이 하락할 두렵다. 그래서 주택가격 하락을 막아 줄 수 있는 정책에 귀를 기울이고 이와 반대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귀를 닫고 행동하지 않는다. 굳이 외면하는 것이 편하다.
20대와 30대는 어떻게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이 없다. 그 보다 나의 토익점수가 더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이 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나의 실력을 키워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한 10여 년이 더 지나면 사회 공공성은 없어질 것이고, 극도의 개인주의 사회가 도래할 것이다. 해경을 못 믿는데, 경찰은 어찌 믿을 것이고, 내 주변 사람들은 어찌 믿을 것인가? 내 스스로 나와 내 가족을 지키려면 각자 총을 휴대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마도 총기휴대를 가능하게 하는 법률을 제정하자는 움직임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이미 10년 전에 던져 놓고 왔다. 사회 공공성은 이미 무너졌는데, 나 혼자 사회 공공성을 주장하면 머쓱하지 않은가? 각자 사는 사회가 사회 비용이 더 든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도 변호사로서 각자 사는 사회에 동참하여야 한다. 싸움은 붙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될 듯 말 듯한 소송을 부추겨 서로 싸우게 만들고, 패소하는 사건도 이길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하면서 수임료를 받아야 한다. 변호사도 공동사회의 구성원이라기 보다 지극한 상인정신을 가지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한 몸을 바쳐야 할 때가 왔다. 각자 도생의 상인 정신으로 전 국민이 정신무장을 해야 하는 사회이다. 변호사인 나도 각자 도생의 정신으로 소송의뢰인을 맞이해야겠다. 내 소송의뢰인들은 각오하시라. 세월호 참사 이후 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고 있다.
(이 칼럼은 외부 기고자에 의한 글로써 당사의 편집 방향 및 의도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