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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시진핑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선출…'대권가도 진입'

중국 연례 최대정치행사의 하나인 제17차 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체회의(17기 5중전회) 나흘째인 18일 시진핑(習近平) 국가부주석이 공상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선출됐다.

시 국가부주석이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에 오르면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의 후계로 최고지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 작년 4중전회에서 시 국가부주석이 당 중앙군사위 부주석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면서 생긴 '대권가도 이상설'은 5중전회를 통해 말끔히 사라졌다는 평가이다.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인 리커창(李克强.55.1955년생) 상무부총리가 제18차 당대회에서 총리로 지명될 게 확실한 만큼 현재로선 2012년에 '시진핑 주석-리커창 총리' 체제의 막이 오른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로써 시 국가부주석은 안정적인 상황관리를 한다면 오는 2012년 10월의 제18차 당 대회에서 마오쩌둥(毛澤東)→덩샤오핑(鄧小平)→장쩌민(江澤民)→후진타오(胡錦濤) 주석을 잇는 제5세대 지도자로 등극할 것으로 예상된다.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올라 차기 지도자로 가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부주석은 자제력과 자기 관리가 뛰어난 대기만성형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다.

푸젠성 성장, 저장성 서기, 상하이 서기 등 동부 연안 지방에 지도자로써 경력을 쌓아 온 시진핑 부주석이 중앙무대에서 위상이 부각된 것은 지난 2007년 봄 상하이시 당서기였던 천량위 (陳良宇)가 비리 사건으로 낙마한 것이 계기가 됐다.
 
당시 저장성 서기로 상하이방의 황태자로 천량위의 빛에 가려져 있던 시부주석은 천량위가 낙마하자 일약 상하이 서기로 중용된데 이어 복잡한 권력구조와 정치계산 속에서 2007년 10월 제17차 당대회에서 리커창 상무부장을 제치고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됐다.

시 부주석이 대권후계의 대운을 잡은데는 상하이방의 위기감 고조라는 정치적 변수와 국무원 부총리와 전국인민대표대회 부위원장(국회부의장 격)을 지낸 시중쉰(習仲勛)을 아버지로 둔 태자당의 출신성분과 칭화대 졸업의 학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또한 평생을 닦아 온 탁월한 자제력과 자기 관리의 능력이 받침됐기 때문이다.

시 부주석은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난 1969년 '지식총년'으로 분류돼 산시성 옌안시 량자허 촌으로 쫓겨 내려가 노동을 강요당했을 떄 무거운 책상자를 갖고 다니며 석유등장불 밑에서 책을 읽었고 한 겨울에 맨발로 얼음구덩이에서 일한 일화가 이 마음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겸손하고 온화해 붙임성이 좋은 것으로 알려진 시진핑 부주석은 쓰촨성으로 달려가 메탄가스 기술을 배워와 량자허 촌에 메탄가스를 끌어 들였다는 것이다. 

'권력은 민중이 준 것이다(權爲民所賦)'라는 민본사상을 가진 시 부주석은 차기 후계자로 낙점이 된 후 중앙당교 교장을 맡아 당 이론연ㄹ구와 인재양성에 앞장서면서 권력 기반을 다졌고, 특히 2008년 베이징올림픽때 준비 총책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중앙 지도자 능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시 부주석은 중국의 국민가수로 인민해방군 가무단장인 펑리위안(彭麗媛)과 결혼했고, 외동딸인 시밍쩌(習明澤.18)가 지난 9월 학기에 하버드대에 입학한 것으로 보도됐다.

<시진핑 당 군사위 부주석 약력 및 주요경력>
출생 1953년6월
학력 칭화대학교 화학 학사, 칭화대학대학원 법학 박사

1971년 중국공 산주의청소년연맹 당원
1974년 중국공 산당 당원
2002~2007년 3월 저장성 당서기, 푸젠성 당서기
2007년 3월 상하이시 당서기
2007년 10월 중앙정치국위원회 상무위원
2010년 10월 중국 국가 부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