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조동일 기자] 선진국들이 유동성 공급정책을 시사한 지난 7월 이후의 원·달러 환율 하락폭이 세계 주요국 통화 중 가장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글로벌 자금 유입과 함께 수출 의존적인 구조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또 중국 위안·달러 환율도 사상 최저를 기록하는 등 아시아 주요국 통화가 동반 강세를 보여왔다.
중국의 위안화 절상 용인으로 아시아 통화는 당분간 동반 강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28일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단기 국채를 매입하는 비전통적 통화정책을 시사한 7월 이후 원·달러 환율은 이달 26일까지 1,146.10원에서 1,097.00원으로 4.3% 하락, 세계 주요국 통화 중 하락 폭이 가장 컸다.
그 다음으로 말레이시아 링깃이 달러당 4.1% 떨어져 뒤를 이었고 싱가포르달러(3.6%), 스웨덴 크로네(3.0%), 노르웨이 크로네(3.0%), 태국 바트(2.8%) 등도 하락폭이 컸다.
이어 캐나다달러(2.2%), 중국 위안(1.8%), 덴마크 크로네(1.8%), 홍콩달러(0.1%), 사우디아라비아 리알(0.01%) 등도 환율이 하락했다.
반면, 영국 파운드가 2.8% 상승한 것을 비롯해 유로(2.2%), 뉴질랜드달러(2.2%), 인도네시아 루피아(1.6%), 호주달러(1.0%), 일본엔(0.5%), 쿠웨이트 디나르 (0.4%)는 상승했다.
바레인 디나르, 아랍에미리트 더히람은 변동이 없었다.
원·달러 환율은 세계 주요국 통화 중 가장 많이 떨어졌고 아시아 주요국 통화도 환율 하락 추세이다. 이 때문에 아시아 주요국은 최근 다양한 기록들을 세웠다.
달러당 위안화는 이달 26일 기준으로 6.2417위안에 달해 사상 최저였다. 홍콩달러 환율은 이달 24일 7.7501홍콩달러로 2009년 12월7일(7.7500홍콩달러) 이후 34개월 만에 최저였고, 싱가포르달러는 이달 18일 1.2168싱가포르달러로 작년 9월9일(1.2140싱가포르달러) 이후 13개월 만에 가장 낮았다.
원·달러 환율이 이달 25일 1,100원선 밑으로 내려간 것도 작년 9월 이후 1년 만에 1,000원대에 진입한 것이었다.
이처럼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통화가 동시에 강세를 보인 것은 ECB의 단기 국채매입과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3차 양적완화(QE3), 일본 중앙은행의 자산매입 규모 증액 등으로 풍부해진 글로벌 유동성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신흥국 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온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아시아 통화는 7월 이후 강세로 돌아섰고 미국의 3차 양적완화가 단행된 9월 이후 강세 정도가 더욱 뚜렷해졌다.
이에 반해 달러화는 QE3 이후 아시아 통화에 비해 약세로 돌아섰다.
비슷한 시기 ECB의 국채매입 결정으로 국제금융 시장에는 유동성이 넘쳐나 자금이 아시아 증시로 몰리게 됐다.
특히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 등 3대 국제 신용평가사가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이 잇따라 상향조정한 것도 원화 절상 폭을 높이는 데 영향을 미쳤다.
이들 신용평가사의 결정으로 한국의 경제 안정성 측면의 매력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국제시장의 급증한 유동성이 아시아 시장 중에서도 한국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국의 기준금리가 연 2.75%로 사실상 제로금리 상태인 미국, 일본 등 선진국에 비해 높은 것도 환차익을 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으로 꼽힌다.
기준금리가 미국은 연 0~0.25%, 일본은 연 0~0.10%로 `제로금리' 상태이고 유로존은 0.75%이다. 이에 반해 한국 2.75%를 비롯해 중국 6.00%, 말레이시아 3.00%, 태국 2.75%, 대만 1.88%로 미국, 유럽 등 선진국에 비해 높다.
한국의 환율 하락은 수출 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와도 관련이 있다.
위안화 강세에 따라 최대 수출국인 중국의 내수 부양 기대감이 형성됐고 이것이 한국 경제의 펀더멘털(기초여건)을 개선시키는 추가 동력이 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최근 몇 달간 국내 경상수지 흑자가 증가해 수출업체의 `네고물량(달러로 받은 대금을 원화로 바꾼 량)'이 많아진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은행은 내년 경상수지 흑자 규모가 34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최근 전망했다. 이는 7월 전망치보다 140억달러 늘어난 것이다.
한국의 이런 경제구조 때문에 원·달러 환율은 세계 1, 2위를 다툴 정도로 변동 폭이 큰 편이다.
수출기업들은 매년 다음해의 환율 전망을 보고 수출대금으로 받을 달러화에 대한 `헤지(위험회피)'를 준비한다. 수출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보니 세계 경제상황이나 환율이 예상과 다르게 움직이면 변동 폭도 그만큼 커지게 된다.
SK증권 염상훈 연구위원은 "기업의 예상대로 환율이 움직일 때는 괜찮지만 예상과 다른 환율 움직임이 나타나면 수출입기업이 입는 타격이 매우 커 외환시장의 불균형이 나타나기 쉬운 게 한국의 경제구조"라고 설명했다.
이런 가운데 최대 수출국인 중국이 미 대선을 앞두고 위안화 평가절상을 용인한 것도 환율 하락에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미 공화당 밋 롬니 대선 후보는 집권하면 중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아직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당국 개입은 적극적이지 않아 아시아 통화 동반 강세는 당분간 지속될 전망이다.
싱가포르, 대만, 필리핀, 태국 등 수출 비중이 높은 일부 국가 외환당국이 급격한 통화 강세에 맞서 시장 개입에 나서고 있지만 추세를 꺾진 못하고 있다.
동부증권 박유나 연구원은 "외환당국이 개입한다고 해도 속도를 조절하는 수준이지만 추세를 꺾진 못할 것"이라며 "원화도 속도조절이 되겠지만 연말까지 환율은 1,080선까지 보고 있다"고 말했다.
원·달러 환율이 기록적인 수준으로 하락하면서 수출기업들에는 `비상등'이 켜졌다. 아직까지는 버틸 수 있는 수준이지만 더 떨어지면 경제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리투자증권이 내놓은 `환율하락민감도분석'에 따르면, 원·달러 환율이 50원 내려갈 때 삼성전자의 순이익은 10% 가량 줄어들 것으로 추정됐다.
우리투자증권 이지형 연구원은 "원화 강세 지속돼 원·달러 환율이 1,050원 수준까지 하락하면 우리 경제에 문제들이 본격적으로 부각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환율이 떨어지면 소비가 증가하고 이에 따라 여행, 항공업종 등 내수주들은 수혜를 입게 된다.
원·달러 환율이 하락하면 외국으로 나가는 여행자가 많아지게 되고 항공사는 항공기 구매에 따른 대규모 외화부채 부담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또 원자재 수입이 많은 기업은 원자재 구입비용이 낮아져 부담이 줄기 때문에 환율 하락을 반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