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김시내 기자]
1심서 징역 18년 받은 피고인 석방
법원 "유죄 심증 갖기는 증거 부족"
지난해 9월 중순 화재로 연기가 솟구친 서울 강남의 월세 80만원짜리 한 빌라.
유흥업소에서 일하는 20대 여성이 흉기에 찔린 채 신음하다가 방 안 화장실에서 발견돼 즉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했다.
현장에서 사건을 목격한 이는 사망한 A씨와 동거하던 친구 B(25·여)씨가 유일했다. 검찰은 B씨를 피의자로 지목했다.
수상한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공소사실에 따르면 B씨는 A씨의 애완견을 죽이고, A씨에게 정체불명의 음료수를 마시게 해 실신하게 한 전력이 있었다.
사건 당일에는 A씨인 척 그의 휴대전화로 외부와 수차례 연락한 데다 A씨한테 4천700만원을 갚으라며 차용증을 쓰게 하고 A씨 동생에게 보증을 서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B씨는 A씨의 목을 두 차례 흉기로 찔러 치명상을 입힌 뒤 화장실로 옮기고, 매트리스에 시너를 뿌려 불을 지르고 도망친 혐의(살인미수·현존건조물방화치사)로 구속돼 재판에 넘겨졌다.
1심 법원은 공소사실을 대부분 받아들여 "혐의를 1%도 인정할 수 없다"고 항변하는 B씨에게 징역 18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1심 재판부는 "평소 피해자에 나쁜 감정을 가진 피고인이 사건 당일 저녁 또다시 피해자와 다투다가 격앙된 감정 때문에 흉기로 피해자의 목을 찔러 살해하려고 했음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꽃다운 나이의 피해자가 제대로 인생을 살아보기도 전에 귀중한 생명을 잃게 됐는데도 피고인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변명과 궤변을 늘어놓으며 실망스러운 태도를 보여줬다"고 꾸짖었다.
하지만 법원의 판단은 2심에서 완전히 뒤집혔다.
항소심에서 B씨는 A씨가 `돈을 갚을 자신이 없다'며 보험금으로 채무를 해결하기 위해 자해했고, 실랑이 끝에 흉기에 찔린 뒤에는 병원으로 옮기려 했으나 거부했다고 주장했다. 불도 A씨가 스스로 지른 것이라고 항변했다.
서울고법 형사7부(윤성원 부장판사)는 원심을 파기하고 무죄를 선고한 뒤 B씨를 풀어줬다고 13일 밝혔다.
재판부는 ▲B씨가 A씨를 해코지한 전력 ▲A씨를 살해하려 한 시도 ▲A씨인 척 다른 사람들과 통화한 사실 ▲증거인멸을 위한 방화 등 모든 혐의를 단정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친구 사이의 다툼과 갈등은 특별한 정신병력이 없고 전과도 없는 피고인이 공소사실처럼 잔인하고 계획적으로 피해자를 살해하려 할 만한 동기로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어 "피고인의 유죄를 의심할 만한 간접증거나 정황이 있지만,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의해 법관이 합리적인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심증을 갖기는 부족했다"고 설명했다.
B씨를 변호한 배재철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한 만삭 의사부인 사망사건과 비슷한 점이 있다"며 "실체적 진실 측면에서도 B씨가 누명을 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만삭 의사부인 사망사건'은 대법원이 올해 6월 임신한 부인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 백모(32)씨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낸 사건이다.
파기환송심은 B씨에게 무죄를 선고한 서울고법 형사7부에서 심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