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정치현장에서는 보수와 진보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지대를 지칭하는 용어들이 묘하게 나타나고 있다. 새누리당에서 탈당한 국회의원들이 바른정당이라는 이름을 짓기 전에 잠정적으로 ‘개혁보수신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였고, 며칠 전 귀국하여 대선경쟁에 합류한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은 자신을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표현하였다.
어제 국민의 당 전당대회에서 새로운 당대표로 선출된 박지원 대표 또한 수락연설에서 당의 정치노선으로서 중도주의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국민의 당이 빅텐트이고 플렛폼이며 제3지대다. 무능한 진보에 지치고 부패한 보수에 속아서 길을 잃은 국민에게 위안과 힘이 되겠다”
구체적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중도주의와 제3지대론은 지난 2,30년 전부터 영국과 독일 등 유럽 몇 개 나라에서 정치학자의 이론적 탐구와 더불어 매력적인 새로운 정치노선으로 선택된 바 있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각광을 받다가 오래 빛을 발하지 못하고 그대로 시들어 버렸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철승 전대표가 40대기수론을 들고 나오던 시대에 이철승의원이 중도통합론을 제기하여 정치적 지지를 당시의 국민들에게 호소한 적이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국민들은 양극단을 배제하고자 하는 중도적 가치에 매력을 느끼기 보다는 중도주의를 선호하는 정치인들을 회색분자로 몰아 결국 이철승의원은 정계를 떠나는 비운을 맛보고 말았다.
이런 정치풍토를 보면 선진외국은 물론 우리나라에 중도주의가 얼마나 뿌리를 내리기 어려운지 잘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의 정치현장에는 완전한 진보나 순수한 보수 보다 중간지대나 제3지대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구축하고자하는 정치인들이 적지 아니하다. 정운찬전총리, 손학규 전대표가 그런 입장이고, 대통령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안희정, 남경필지사의 입장 또한 최근 발표하고 있는 언명의 색채가 그러하다. 나아가 각종의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고 있는 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조차 자신이야말로 ‘진실한 보수’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국민들 대다수는 문재인 전 대표는 가장 명확한 진보주의자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표현은 국민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정치인들의 행태는 결국 진보나 보수만 부르짖어서는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기 힘들다는 정치공학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보수주의에서 우리 사회에서 올바른 것은 유지하고 진보주의에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혁하는 것을 융합하는 것이 중도주의라고 한다면 당면한 우리의 정치이념으로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정책선택의 기준에서 그런 가치와 이념이 활용 되어야 하지, 대선에서 유권자의 표를 흡수하기 위한 영역 넓히기의 수단으로만 제3지대론이 이용된다면 이런 정치적 태도와 처신이 한국정치발전에 또 하나의 장애물이 되고 말 것이다.
많은 국민들이 박근혜대통령이 보여준 패권주의의 정치적 실패가 민주당의 문재인 전 대표에 의하여 이 땅에 재현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임을 부정할 수 없으며, 얼핏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보이는 정치적 중도주의와 제3지대론이 한국의 정치문화에서 제대로 꽃을 피울 수 있을지 깊은 염려 속에서 조심스러운 기대를 해 보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정치적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