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가정을 예로 들어보자.
이 집 사람들은 교외에 위치한 아파트에서 거주한다. 이 아파트를 지은 회사는 TV와 냉장고도 생산하고, 핸드폰도 개발한다. 심지어 매일 입고 다니는 옷을 디자인한 것도 같은 회사 계열사이며 예금 적금이나 손해보험 등 금융상품까지 이 기업 지점을 방문해 들어야 한다. 익숙한 이야기지 않은가?
그러나 이건 한국이 아닌 이스라엘 이야기다. 이스라엘의 IDB와 델렉(Delek) 그룹은 300억 달러 자산을 보유하며 4만 명이 넘는 직원을 고용하던 대기업이었다. 이 두 기업은 통신사, 건설, 슈퍼마켓, 시멘트, 종이, 화학, 소매, 보험, 의료, 여행, 신문 등 다양한 업종에서 선두기업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재벌은 해체됐다.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네타냐후 총리를 필두로 한 이스라엘 내각이 재벌 해체 (Break-up conglomerates)를 결정한 건 불과 3년 전인 2012년 4월의 일이었다.
이스라엘 인구는 한국의 1/6, GDP 규모는 1/5 정도다. 1인당 국민소득은 31000달러 수준으로 경제적으로 선진국 수준에 이른다. 전형적인 강소국인 셈이다.
이스라엘 경제 구조엔 두 가지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산업 영역을 넘나드는 거대 재벌에 의해 시장이 장악되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재벌과 은행이 사실상 하나로 연결된 거대한 자본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슬라엘의 Big5은행은 모두 재벌과 긴밀히 연결돼 있었다.
상위 10대 재벌기업 시가 총액은 전체 시가총액의 40%를 초과 했고 상위 6대 재벌 그룹 매출액은 이스라엘 전체 GDP의 25%를 차지했다. 병폐 역시 한국 재벌과 비슷했다. 시너지 효과가 없는 분야까지 사업을 확장하는 통에 비합리적 경영 행태가 비효율을 초래했고, 금산분리가 실현되지 않아 기업의 자본에 대한 유착도 심각했다.
네타냐후 총리의 재벌 개혁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재벌 개혁을 회의적으로 보는 시선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재벌 개혁이 경제에 미칠 파급에 대한 두려움이고, 다른 하나는 대기업이 정치, 관료, 언론, 경제와 유착해있다는 점에서 오는 회의감이다. 재벌개혁을 주장하고 추진해야 할 정당과 언론, 집행해야 할 관료가 재벌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는 상황에서 재벌개혁은 허황된 꿈처럼 보이기도 하다.
네타냐후 총리가 주력한 두 가지 정책은 <산업자본과 금융자본 분리>, <피라미드식 소유구조 제한> 두 가지였다.
이스라엘은 1990년대 세계적으로 밀어닥친 민영화 바람에 떠밀려 국영은행을 민영화해 재벌에 넘기는 실수를 했다. 금산분리법에 의해 대기업이 은행을 소유하지 못하는 한국과 다르게, 이스라엘 대기업은 은행까지 계열사로 두고 있었던 거다.
덕분에 금산분리법 제정은 재벌그룹이 필연적으로 쪼개지게 되는 계기가 됐다. IDB는 계열사 '크랄 보험'을 처분했고, 델렉 그룹도 자사의 보험계열사 '피닉스'를 매각했다.
한국 대기업이 순환출자 구조를 통해 오너 일가의 기업 내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반면, 이스라엘 재벌은 지주회사 형식으로 피라미드형 재벌 계열사 출자관계를 형성했다. 이에 내각은 '피라미드식 소유 구조 제한'조치로 출자 관계를 '지주회사-자회사-손자회사-증손회사'의 4단계 까지만 인정하는 강수를 뒀다.
신규 기업에 대한 규제안은 더 강력해, 3단계인 손자회사 까지만 인정하게 됐다. 무분별한 기업 확장이 원천 봉쇄된 거다.
내각은 이 외에도 외구인 참여 이사회 요건 강화, 소수 주주권 강화, 공적 연기금 투자시 주주권 강화, 공적 자산 매각시 재벌 참여 제한 등 다양한 재벌 규제안을 마련했다.
이스라엘 내각이 재벌을 해체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재벌개혁에 대한 윤곽은 2011년 9월에 나오기 시작했다. 높은 주택 임대료로 살기 어렵다는 글이 이스라엘 페이스북에 올라오기 시작했고, 이에 동조한 사람들이 이스라엘 최대 도시 '텔 아비브'중심가에 텐트를 세우고 숙식하는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 탓에 한국에서 안보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시 그동안 아랍과의 정쟁을 겪으며 정부에 저항하는 운동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이 시위는 서민뿐 아니라 중산층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전국에서 30만 명이 넘는 시민이 이에 참여했다. 한국 인구로 환산하면 적어도 200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시위였던 거다.
당시 이스라엘 경기는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에서 벗어나 4~5% 성장률을 유지는 안정된 시기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2000년도 초반보다 높은 물가가 지속되어 체감되는 경기는 인플레이션과 다름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언론은 물가 상승 원인을 시위로 인한 경기 침체 탓이라 몰아갔지만, 시민은 이 문제의 원인을 불평등에서 찾았다.
이스라엘의 불평등 지수는 OECD 하위 5개 국에 들어갈 정도로 높다. 이스라엘의 지니계수(불평등지수)는 3.9로 유럽연합이 3.0, 한국이 3.1 내외인 것을 생각하면 심각한 수준인 거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3.5 수준이었으나 소득 격차가 빠르게 벌어지며 2008년엔 빈곤선 이하 가구가 무려 24%로 늘어나 상황이 악화되었다.
시민이 분노한 결정적 원인은 식료품과 주거, 교육과 건강 등 아주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당혹과 절망감이었다. 그들은 생존을 걸고 독점적 재벌에 의한 경제 통제에 맞서기 시작했던 거다.
그렇다면 한국 기업의 금산분리는 어떤가?
한국 금산분리법은 기업이 은행 지분을 9%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본래 4%로 고정돼 있었으나 이명박 정부가 친기업 정책을 추진하며 9%로 늘렸다.
금산분리란 '법명'은 있으나 한국 대기업의 금산분리는 완전하지 않다. 삼성을 비롯한 대기업이 증권가나 보험사 등 금융 계열사를 소유하고 있는 등 '금산분리(금융과 산업의 분리)'가 아닌 '은산분리(은행과 산업의 분리)'만 겨우 준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삼성 그룹만 들여다 봐도 삼성생명, 삼성카드 등 금융기업은 순환출자 구조에서 최상위 소유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이후 변수가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체제를 공고히 하는데 합병 목적이 있는 만큼, 이 금융기업의 역할이 크게 변하진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대기업도 금산분리 강화와 순환출자 구조 금지를 기준으로 한 개혁으로 해체될 가능성이 있는 거다.
이번 롯데 사태는 재벌 기업에 대한 회의감이 또다시 고개를 드는 사례가 되었다.
재벌은 필연적으로 기업과 산업 구조를 비효율로 이끌고, 국가 경제를 왜곡하는 기업의 악습이다. 이미 세계시장에서 재벌기업이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국가 경제 성장의 걸림돌이 될 거란 연구 결과도 수없이 축적됐다. 이젠 기득권을 버리고 상생의 길로 나설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개혁을 실현하는 동기는 국민의 강렬한 의지에 있다. 얽히고 섥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지례 포기한다면 머지않아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 맨몸으로 거대 기업을 상대해야 하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