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대기업 비리에 대해 칼날을 빼들었다. 대기업 총수 일가의 편법 증여와 비자금 조성 등을 정조준 하고 있다. 이는 이명박 정부 후반기의 국정운영 기조인 ‘공정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액션으로 풀이된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 등 경제계 생태계의 재구성에 의욕을 보이고 있는 정부는 대기업 총수 일가의 비리 척결을 통해 ‘공정 사회’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그동안 역대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대대적인 대기업 비리 사정으로 총수 일가의 불법과 탈법을 적발했다. 하지만 총수들 대부분 특별사면 형식을 통해 복권돼 다시 경영 일선에 나서는 등 대기업의 비리가 좀처럼 근절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 태광그룹, 편법 상속·증여 의혹
지난 13일 서울 서부지검은 태광그룹의 편법 상속, 증여 의혹과 관련 서울 장충동 태광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했다. 이날 국내 최초의 증권 집단소송을 이끌었던 서울인베스트는 태광산업 소액주주를 대표해 태광그룹의 3대 편법 상속과 증여 의혹을 제기했다. 서울인베스트는 태광산업 주요 계열사 공시자료를 분석한 결과 태광그룹 이호진 대표이사가 기업활동으로 확보된 자산을 자신과 아들 현준(16)군이 지배하고 있는 비상장 기업에 편법 이전하는 방법으로 현준군이 태광그룹 전체를 소유할 수 있도록 지배구조를 재편성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검찰은 지난 17일 태광그룹 이호진 회장의 자택과 사무실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회계자료 분석을 통해 비자금 조성과 편법증여 등에 대한 증거를 상당 부분 확보했다. 또 이 회장이 계열사 자산뿐 아니라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상속재산으로 수천억원에 달하는 비자금을 조성한 정황도 포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압수물 분석과 계좌추적 작업이 마무리되는 대로 이 회장 일가를 피내사자 신분으로 이번 주 소환할 방침이다. 검찰은 이 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한 경위와 자금 출처, 아들 현준(16)군에게 경영권을 넘겨주기 위해 그룹의 주요 계열사 지분을 편법으로 증여했는지 여부를 집중 조사할 방침이다.
태광실업이 조성한 비자금의 용처도 집중조사 대상이다. 2008년 태광그룹의 케이블TV 사업 확장 과정에서 청와대와 방송통신위원회에 대한 로비 자금으로 쓰였는가 여부다. 또 2006년 쌍용화재(현 흥국화재해상보험)를 인수할 당시 금융감독 당국의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본격 수사가 이뤄진다.
한편 이 회장은 검찰이 그룹 본사를 압수수색하기 이틀전인 지난 11일 출국했으며 일정을 앞당겨 닷새 만인 15일 오후 11시10분쯤 귀국했다. 검찰은 이 회장 귀국 10시간만인 16일 오전 9시쯤 그의 서울 장충동 자택과 광화문 사무실, 부산에 있는 그룹 소유 골프장 등 3곳에 대해 비자금 조성과 로비 의혹 관련 자료를 압수했다.
◆ 한화그룹은 비자금 조성
검찰은 지난달 16일 한화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과 관련 서울 장교동 그룹 본사와 여의도 한화증권 사무실을 전격 압수수색했다. 검찰은 회계장부 등 내부 서류와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통해 그룹 본사와 한화증권이 차명계좌를 통해 김승연 회장의 비자금을 관리했다는 의혹을 본격적으로 조사 중이다.
한화그룹 비자금 조성 의혹은 한화증권을 퇴사한 한 직원이 올해 초 ‘회사가 그룹 비자금 관리에 쓰는 불법 계좌를 갖고 있다’며 금융감독원에 제보해 불거진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은 지난 7월께 거액이 오간 차명계좌 5개를 확인해 검찰에 수사를 의뢰했고, 대검은 한 달 가량 내사를 벌이다 서부지검으로 넘겼다.
◆ 사면 복권으로 경제인 ‘원위치’
정부는 광복 63주년과 건국 60주년을 맞아 경제살리기를 통한 일자리 창출과 ‘화합과 동반의 시대’를 열기 위해 특별사면과 복권을 지난 8월 15일 단행했다.
당시 특사에서는 지난해 보복폭행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사회봉사명령을 받고 있던 정몽구 현대기아차그룹 회장이 포함됐다.
또 손길승 전 SK그룹 회장과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이재관 전 새한그룹 부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등이 명단에 들어갔다. 이와 함께 장치혁 전 고합회장과 김영진 전 진도회장, 김윤규 전 현대건설 대표이사, 안병균 전 나산그룹 회장, 엄상호 전 건영그룹 회장 등도 사면 복권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특히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은 지난해 말 단독 특별사면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당시 정부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에 대한 국민적 성원을 감안한 것’이라고 배경을 밝혓다.
이렇다보니 사회단체에선 “경제살리기가 목적이라면 정경유착과 밀실경영으로 법질서를 훼손한 경제인을 엄벌하고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는 게 시급하다”며 실정법을 위반한 경제인의 사면과 복권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다.
이번 태광그룹과 한화그룹 수사 결과에 여론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집권 후반기 정책기조로 ‘공정 사회’와 ‘친서민’ 정책을 내건 현 정부의 실천의지가 어떤 지를 가늠할 수 있는 분수령이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