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김시내 기자] 수십년 가정폭력을 휘두른 가장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던 모녀가 "피고인들은 이미 수십년간 이유 없는 폭력에 시달리며 누구보다 큰 괴로움을 겪어왔다"며 15시간이 넘는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살인과 존속살해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폭행치사와 존속폭행치사 혐의는 유죄가 인정돼 집행유예가 선고됐다.
수원지법 형사12부(김정운 부장판사)는 4일 술에 취해 가족 모두를 죽이겠다고 흉기를 찾는 가장(48)의 입을 테이프로 막은 뒤 장시간 방치해 질식사시킨 혐의(살인·존속살해)로 기소된 A(48·여)씨와 둘째딸(26·여)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폭행치사와 존속폭행치사 혐의에 대해서는 과잉방어로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A씨는 지난 4월11일 오후 10시께 성남시 중원구 자신의 집에서 아침부터 심한 술주정을 계속하다 "수원에서 3일간 일한 돈을 받지 못했다"며 감정이 격해져 "다 죽이겠다"며 속옷만 입은 채로 흉기를 찾는 남편의 손발을 줄넘기줄과 케이블선으로 묶고 입을 청테이프로 막은 뒤 4시간 넘게 방치해 숨지게 한 혐의로 기소되자 5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어릴 적부터 술에 취한 아버지로부터 상습적인 폭력에 시달려 온 둘째딸 B씨와 씨름선수였던 막내아들 C(14)군도 아버지를 결박하고 제압하는 과정을 도왔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가 뇌병변 1급장애를 앓고 있는 큰딸(28)의 머리채를 잡는 등 폭력을 휘둘러 평소보다 유난히 난폭했던 아버지를 그대로 뒀다가는 정말로 무슨 큰일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사건 당일 장애인 딸의 머리채를 잡아 화장실 벽면에 찧는 소리가 온 집안에 쿵쿵 울릴 정도였다.
중학교 때부터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려온 셋째딸(21·여)이 발길질을 피해 집밖으로 뛰쳐나갔고 씨름선수인 C군이 이를 막으면서 아버지가 쓰러지자 A씨는 다급하게 옆에 있던 줄넘기줄과 케이블선으로 남편의 손과 발을 묶었다. 애완동물의 털을 제거할 때 사용하던 청테이프로는 고함을 치는 입을 막았다.
이날 A씨 남편은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아침부터 술을 마셨다. 아침에 일어나 막걸리 5병을 혼자 비운 그는 낮동안 잠이 들었다가 저녁에 다시 일어나 또 술을 마셨다.
A씨는 결박한 남편을 자녀들과 함께 안방으로 옮긴 뒤 이불을 씌웠다. 남편의 격한 몸부림으로 이불이 헝클어지자 몸에 덮은 이불을 청테이프로 고정했다.
오전 2시께 청테이프 사이로 들리던 신음소리가 들리지 않아 확인해보니 남편이 숨을 쉬지 않았고 놀라 119에 신고했다.
A씨는 경찰 수사 초기에는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했다가 남편 몸에서 테이프를 붙인 흔적이 발견되자 범행 과정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아버지는 아내가 첫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이유 없는 폭력을 행사했고 흉기로 아내의 옆구리를 찌르기도 했다.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막내아들을 제외한 세딸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가했고, 방황하던 첫딸은 18살 때 오토바이 사고로 장애까지 얻게 됐다. 이 때부터 아버지는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다"면서 폭력의 수위를 더욱 높였고, 딸들이 입에 거품을 물고 거품을 물고 경기를 할 때가지 폭력을 가했다. 또 딸들에 대한 성추행도 서슴지 않았다.
9명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살인 및 존속살해 혐의에 대해 전원 무죄, 폭행치사 및 존속폭행치사 혐의에 대해서는 과잉방위를 인정해 집행유예 의견을 냈다.
지난 3일 오전부터 15시간 넘게 계속된 재판을 마무리하며 재판부가 4일 0시25분께 A씨 모녀에게 집행유예 판결을 내리고 석방을 선고하자 수원지법 110호 법정은 눈물바다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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