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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량살상무기' 금융 파생상품, 한국이 세계 최대 시장

[재경일보 양진석 기자] '투자의 귀재' 워런 버핏이 2003년 ‘대량 살상무기(WMD)’와 같다고 비판한 금융 파생상품 시장 규모에서 한국이 세계 1위인 것으로 나타났다. 안정적인 수익보다는 최근 미국의 국가신용등급 강등처럼 증시의 급등락을 일으키는 대형 사태가 발생할 시 로또처럼 터지는 '대박', '인생한방', '인생역전'을 노리는 도박성 투자자들 이 시장에 대거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버핏은 투기성이 짙은 파생상품 거래는 대규모 손실을 감추고 있다가 일시에 드러내 투자자들이 엄청난 충격을 받고 경제가 후퇴한다고 경고했는데, 실제로 버핏의 비판이 있은 지 5년 뒤에 세계 금융위기가 일어나 이 상품의 위험성을 증명했다. 파생상품 시장은 위험 회피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현물시장을 압도할 만큼 기형적으로 급팽창해 각종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한국이 이 시장에서 세계 1위로 떠올라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국내 금융 파생상품시장 ‘세계 최대’로 급팽창

15일 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국내 금융 파생상품 시장 거래대금 예상치는 3경350조원에 달한다. 이는 코스피200 옵션과 선물, 미국 달러선물, 국채선물, 주식워런트증권(ELW) 등 장내 파생상품뿐만 아니라 주식, 이자율, 통화, 신용 등과 연계된 장외 파생상품을 모두 포함한 거래대금이다.

국내 금융 파생상품 시장은 지난 1995년 국내에서 금융 파생상품이 처음 거래된 이후 빠르게 성장을 거듭해 불과 15년 만에 천문학적인 금액이 오가는 세계 최대 시장이 된 것이다.

실제로 국내 장내·외 파생상품 거래대금은 한 해도 쉬지 않고 증가했다. 2006년 1경480조2천억원으로 1경원을 처음 넘겼고, 2008년에는 2경1천147조8천억원으로 2경원을 돌파했다.

특히 장내 파생상품시장 규모는 매우 큰 편이다.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장내 파생상품시장 거래대금 합계는 1경4천266조1천억원으로 같은 기간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의 총 거래대금인 1천908조4천억원에 비해 7.5배나 된다.

세계 주요 자본시장과 비교해도 거의 압도적인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거래소의 파생상품 거래량은 37억5천200만계약으로 전 세계 거래량의 16.8%를 차지, 2위인 독일 파생상품 거래량 18억9천700만계약(8.5%)의 2배에 육박하고 있다.

코스피200 옵션시장은 세계 주가지수 옵션시장에서 차지하는 거래량 비중이 69.0%나 돼 2위인 인도증권거래소(10.4%)의 7배에 이르렀다.

한국거래소의 시가총액이 1천95조1천억원(9월말 기준)으로 세계 17위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파생상품시장은 헤지 기능을 넘어서 과도하게 커졌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부작용이 심각하다는 점이다. 기형적으로 거대한 파생상품시장에 외국인이나 기관보다 전문성이 떨어지면서도 일확천금을 노리는 개인투자자들이 몰려 막대한 손실을 보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인버스ETF는 코스피와 거꾸로 움직이도록 설계돼 있어 하락장에서 큰 수익을 거둘 수 있다. 최근 미국 신용등급 강등으로 증시가 대폭락했을 때, 이 상품에 투자한 이들은 대박을 터트렸다. 하지만 대부분 엇박자로 투자해 피해를 본 개미들이 더 많았다.

지난해 장내 파생상품시장에서 개인의 거래비중은 32.3%로 외국인(31.5%)보다 높았고 기관(32.3%)과 비슷했다. 하지만 외국인과 기관들이 쏠쏠한 재미를 보는 동안 개인들은 이익보다는 피해를 더 많이 봤다.

금감원 관계자는 “옵션과 ELW 시장에서 국내 개인들은 외국인보다 경쟁력이 매우 떨어진다. 초단타매매를 하는 일부 개인들(스캘퍼)도 있어 소액을 투자하는 개인들은 먹잇감이 되기 쉽다”고 지적했다.

◇증시 공포가 한국 파생시장 급팽창 계기

장내 파생시장이 기형적으로 성장하게 된 결정적 원인으로 2001년에 터진 9·11테러가 꼽히고 있다. 예상치 못한 테러 사건으로 인해 주가가 폭락해 대부분 투자자가 공포에 떠는 동안 당시 풋옵션을 매수한 일부 투자자는 하루 만에 504배의 기록적인 수익률을 남겼고, 이를 계기로 옵션거래가 폭증했다. 실제로 2001년 옵션시장의 하루 평균 거래량은 전년보다 4배 이상 늘어났다.

2008년 9월에 불거진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도 파생시장 거래를 부추기는 계기가 됐다. 리먼이 파산보호 신청을 한 다음날 옵션 가격은 최고 130배 급등했다. 그해 연초 월 10조원대로 잠시 주춤했던 옵션 거래가 리먼 사태가 터진 9월에는 30조원대로 다시 팽창했다. 그 다음달에는 무려 44조원이 거래돼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월 44조원이라는 최대 거래 기록은 지난 8월까지 3년 가까이 유지됐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연구위원은 “개인의 참여 비중이 크게 늘어나면서 장내 파생상품시장이 커졌다. 파생시장내 개인 투자자의 상당수가 레버리지(지렛대) 효과를 노리고 들어온 것이어서 리스크가 과도하게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