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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최고 권력자로 37년간 독재 정치 펼쳐

[재경일보 배규정 기자] 17일 사망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북한 정권을 세운 아버지 김일성으로부터 1980년 권력을 물려받은 이후 37년간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정일은 1942년 2월16일 량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하지만 김정일의 실제 출생연도는 1941년이다.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2년 뒤인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로 규정하고 특히 매 5주년, 10주년 등 이른바 '꺾어지는 해'에 대규모 경축행사를 여는데 두 지도자의 꺾어지는 해를 맞추려고 김 위원장의 출생 연도를 김일성의 12년에 맞춰 42년으로 늦춘 것이다.

김정일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와 그의 항일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조국 땅에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모성 결핍'을 낳았고, 이어 그를 후계자 자리를 둘러싸고 계모 및 이복형제와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냉혹한 성격의 소유자로 만들었다.

김 위원장이 5살 연상의 성혜림과 동거한 것도 모성 결핍이 한 원인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고 그 이후 고영희•김옥과 동거하면서도 이들의 모성애에 상당히 기댔던 것으로 알려졌다.

휴전 후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한편 소련 방문 때 소련 공산당 관계자가 모스크바 종합대학 입박을 권유했지만 "평양에도 김일성종합대학이라는 훌륭한 대학이 있어요. 나는 김일성대학에서 공부할 겁니다"라고 답변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당 조직지도부를 통해 정치에 입문한 그는 이후 1974년 후계자로 내정될 때까지 10년의 시간은 권력승계를 위한 경험축적과 자질향상, 김일성의 인증 확보를 위한 중요한 시기였다.

조직지도부 지도원에 이어 1967년부터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을 거치면서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이용해 김일성의 정책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과 그들의 활동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데 앞장섰다.

특히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등 예술부문을 전담하면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부각하고 유일지배체제를 강화하는 영화와 가극, 소설 등을 대거 창작함으로써 충성심을 과시하고 후계자로서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로 활용했다.

이를 통해 김일성의 신뢰를 확보한 김정일은 김정숙의 항일빨치산 동료인 원로간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인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물리치고 나서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어 이듬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후계자 내정을 앞둔 1972년 12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주석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과 국가기구 개편을 단행, 김일성이 주석으로서 국정에 전념하도록 하는 대신 김정일은 조직 및 선전비서로서 당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구축했다.

한편으로는 당 조직지도부를 확대 개편해 모든 인사권과 통제 및 감시권을 가진 핵심부서로 만들고 김일성에게 올라가는 모든 보고가 사전에 반드시 자신을 거치도록 하는 시스템 구축해 국가권력 전반을 장악했다.

군에 대해서는 직접 장악보다는 '군에 대한 당의 영도력 강화'라는 명분을 내걸고 군 인사권을 당 조직지도부로 이관해 통제함으로써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다.

김정일이 권력장악을 위해 가장 몰두한 것은 최대 정적이었던 친인척 제거였다.

김정일의 정적 중 삼촌 김영주는 반종파투쟁 과정에 그의 측근들이 제거됐으며 1970년대 후반 자강도 강계로 쫓겨나 외부와 격리된 사실상의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또 계모와 이복동생들은 '곁가지'로 규정하고 1975년부터 이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된 사람들을 전부 조사해 추방했으며, 본인들은 모두 해외에 내보내 국내에서 새로운 추종세력이 형성되거나 결집할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이 시기 김정일은 경제분야에도 손을 뻗쳐 당권 장악 차원에서 전국의 알짜 공장과 농장을 국가경제 시스템에서 떼어내 당 산하로 소속시키는 '당 경제'를 조성했으며, 이러한 체제는 국가경제를 훨씬 추월하고 김정일만을 위한 독립적인 경제분야로 급속히 성장했다.

한편으론 하락세를 타기 시작하던 당시의 경제침체 상황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권력장악의 기회로 삼고자 '70일전투', '속도전' 등 다양한 증산 캠페인과 무리한 대중동원 방식을 발기했다.

하지만 김일성 우상화와 후계체제 강화, 남북간 체제 경쟁 등을 의식해 그가 주도한 이런 식의 경제운용 시스템은 경제논리를 철저히 무시하고 정치논리만을 내세운 것으로 오늘날 북한 경제와 주민생활을 본격적인 하강국면으로 몰아넣은 주요한 원인의 하나가 됐다.

김정일은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절차까지 마무리했다.

그러나 이 시기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했으며,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는 완전히 붕괴해 수백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해졌다.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핵문제로 대립하고 있었고 전통적 우방인 중국과 러시아와는 한국과 수교 이후 지속적으로 갈등을 빚으면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고립상태나 다름없었다.

김정일은 이러한 경제적외교적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나름의 변화를 추구했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그는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파격적인 남북교류를 추진했으며 2000년에는 반세기만의 정상회담을 하고 6•15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하기도 했다.

동시에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서면서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과 만났고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고백외교'를 통해 북일수교에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지만 국제적으로는 고립을 심화시키기도 했다. 또한 지난해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등 잇단 도발로 다시 국제적 고립을 자초했다.

결국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건강 이상설에 휩싸였으며 지난해 삼남 김정은을 후계자로 지명해 현대사에 유례없는 3대 세습을 구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