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션

"사력다해 반항하지 않아도 강간"… 법원, 강간죄 폭넓게 적용

[재경일보 김시내 기자] 강간죄 성립 요건인 `폭행·협박의 정도'를 폭넓게 적용,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아도 강간이라며 1심에서 무죄를 받은 성폭행범에게 실형을 선고한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이는 국가인권위원회가 국회와 법무부에 최근 전달한 형법 개선 권고·의견 표명안과 일맥상통하는 판결이어서 주목된다.

서울고법 형사9부(김주현 부장판사)는 보험설계사 B(여)씨를 집으로 유인해 성폭행한 혐의(강간)로 기소돼 1심에서 무죄를 받은 50대 남성 A씨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고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40시간 이수를 명했다고 16일 밝혔다.

재판부는 "강간죄 성립 여부는 사건 당시와 이후의 구체적인 상황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B씨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B씨가 위협적인 분위기를 느껴 반항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고통스러운 기억 탓에 오락가락 진술했을 수 있으며 강간죄 폭행이 반드시 신체의 손상을 동반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조목조목 지적했다.

이어 B씨가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데 반해 A씨는 계속 범행을 부인하며 반성하고 있지 않은 점을 고려해 형량을 정했다고 밝혔다.

A씨는 지난해 2월 고액 보험에 들어줄 테니 청약서를 갖고 오라며 보험설계사 B씨를 집으로 끌어들여 억지로 성관계를 가졌다.

A씨는 이 과정에서 상의를 벗어 가슴에 난 흉터를 내보이며 "예전에 조폭이었다"고 윽박지르고, 몸부림치며 완강히 거부하는 B씨를 짓눌렀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 B씨의 팔과 다리에 심한 손상이 남아있지 않은 점, B씨가 사건 직후 A씨에게 전화해 길게 통화한 점, 진술이 일부 과장되거나 일관되지 못한 점을 함께 고려해 "B씨가 내키지 않은 상태에서 피고인과 성관계를 가졌을 가능성은 농후하지만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협박'을 당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강간죄가 성립되지 않는다고 보고 무죄를 선고했다.

인권위는 형법상 강간죄의 요건인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의 폭행과 협박'을 `반항이 곤란한 정도의 폭행과 협박'으로 완화해야 한다는 의견을 지난 1일 표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