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태 한국은행 총재가 4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재임기간 동안 일관된 말과 행동으로 시장의 신뢰를 받았던 이 총재는 31일 "무거운 짐을 지워 놓고 훌쩍 떠나는 것 같아 미안하다"며 한은을 나섰다.
이 총재는 당분간 특별한 대외활동 없이 휴식을 취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관례적으로 퇴임 총재가 맡는 고문직에 대해서도 "차차 생각해 보겠다"며 결정을 유보했다.
그는 이임식 직전 출입기자들과 만나 퇴임 소감을 묻는 질문에 "올 때가 있으면 갈 때가 있는 것이다. 떠날 때는 말없이 조용히…"라는 말을 남겼다.
이 총재는 주택가격이 급등하고 고유가 등 인플레이션 우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취임했다. 당시 그는 기준금리를 과감히 인상하며 물가 잡기에 나섰다. 덕분에 그의 뒤에는 항상 '인플레이션 파이터'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금리인상론자로 알려진 이 총재는 금통위 내에서 '매파'로 분류됐지만 최근 경제동향간담회에서 "나는 매파가 아니었다"며 이를 부인하기도 했다.
임기 중반에는 유례없는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금리를 인하하고 유동성을 공급하는 비상조치를 취해야 했다. 당시 한은의 정책 대응에 대해 시장의 평가가 엇갈리지만 대체로 "잘했다"는 쪽이다. 이 총재도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성과"라고 자평한 바 있다.
하지만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부의 '금리 인상 반대'의 벽을 넘지 못하고 연 2.0%인 기준금리를 13개월째 동결, 금리정상화의 과제를 차기 총재에게 넘긴 점에 대해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지적이다.
정부와의 '소통'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경제위기 상황에서는 정부와 중앙은행간의 협조가 필수인데 전 정권의 인사인 이 총재가 현 정부와의 소통에 어려움을 느낀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기획재정부의 금통위 '열석발언권' 행사로 극도로 불편해진 정부와의 관계를 끝내 복원하지 못한 점은 '정치력 부재'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 총재는 이날 오후 한은 별관 강당에서 열린 이임사에서 "중앙은행의 위상, 특히 정부와의 관계에 대해 진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며 "정부와 중앙은행이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면서도 각자 서로의 고유 역할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계부채에 대한 걱정을 놓지 못했다. 그는 "과도한 가계부채는 실물경제에도 큰 부담을 줄 수 있는 만큼 경계를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한은 임직원들은 이날 전통대로 이임식장 입구에서 한은 정문에 세워진 차량까지 도열해 이 총재를 배웅했다. 이 총재는 밝은 얼굴로 손을 흔들며 직원들의 뜨거운 박수에 화답했다.
한편, 김중수 신임 총재는 오는 1일 별관 강당에서 취임식을 갖고 본격적인 업무에 돌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