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9월 15일 라면이 국내에 상륙한 후 어느덧 47년이 흘렀다.
어려웠던 시절 배고픔에 시달리던 국민들의 배를 채워주던 라면은 이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식사대용으로, 출출함을 달래는 야식으로 사랑 받고 있다.
라면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단순한 면과 스프의 조합이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입맛에 따라 변화하며 떡라면, 치즈라면, 카레라면, 짜장라면 등 수 십 가지의 종류로 변신에 성공했고 떡볶이, 부대찌개 등 각종 음식의 부재료로도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국민 대표음식으로 사랑받고 있는 라면 탄생 47년을 맞아 라면이 우리와 함께 걸어온 길을 되짚어본다.
◆ 라면의 꿈은 배고픔으로부터 시작됐다.
라면의 역사는 1963년 삼양으로부터 시작된다.
삼양라면을 설립한 전중윤 명예회장이 남대문 시장을 지나가던 중 사람들이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줄을 서 있는 것을 보고 국내 식량 자급문제해결이 시급하다고 판단해 일본에서 보았던 편리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의 국내 생산을 계획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고 우리 국민들은 미군의 음식쓰레기로 꿀꿀이죽을 끓여먹으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삼양은 일본 ‘묘조라면’ 사장을 수개월간 설득해 노하우를 전부 이전받아 삼양라면을 생산했으며 이로써 국민의 대표먹거리가 탄생했다.
◆ 사람들의 외면, 극복과 성장
곡식 위주의 생활을 하던 우리국민들은 들어보지도 못한 라면이란 제품이 나오자 ‘면’이 섬유나 실의 명칭이라 오해해 구입하지 않으려 했다.
이에 삼양식품은 캠페인 성격의 직접시식을 실시하고 적극적인 라면 알리기에 나섰다.
그 당시 생소했던 라면을 꺼려하던 사람들도 직접 맛을 보고나서 라면을 인정하게 됐고 입소문을 통해 전국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 중량 100g, 10원대의 가격에 출시된 삼양라면은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장을 거듭해 6년 만에 초창기 매출액 대비 300배에 달하는 성장을 달성하게 된다.
이 후 라면이 탄생한지 2년이 지난 후 롯데공업(현재 농심)에서도 롯데라면을 생산하며 국내 라면시장 활성화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라면시장이 점점 커져가자 조선일보, 동방유량, 럭키(엘지)도 라면사업에 뛰어들었다.
60~70년대를 지나면서 라면은 대한민국의 대표적 인스턴트식품이 되었고 80년대 말 라면의 다양성과 고급화를 바라는 소비자들의 욕구에 따라 빙그레, 야쿠르트, 오뚜기 등 후발주자들이 대거 합류하게 된다.
현재 국내 라면시장은 국민의 대표음식을 넘어 미국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전 세계 95개국에 2억달러가 넘게 수출하는 시장으로 성장했다.
◆ 라면 인스턴트의 틀을 벗어 던지다
인스턴트식품으로 알려져 오던 라면은 진화를 시작했다.
단편적이었던 라면의 이미지를 벗고 라면전문점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메뉴로 끊임없는 이미지 변화를 시도했다.
라면은 경기불황속에서도 꾸준히 매출을 올리고 있고 틈새라면, 맛좀볼래 등 대형 라면전문점까지 등장하며 라면시장은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
이로써 라면은 현재 든든한 한끼 식사로 인식되고 있으며 고급스럽고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상승세를 이어오던 라면시장이 1989년 ‘라면파동’을 일으키며 소비자의 신뢰를 잃어 폐업직전까지 몰렸다.
‘공업용우지’사용한 사건이 언론사들에 의해 보도되며 삼양라면, 서울 하인즈, 오뚜기 식품, 삼양유지 등은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입게 된다.
사건발생 9년 뒤 1997년 대법원은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이미 땅에 떨어져 버린 기업이미지를 아직까지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외에도 농심 ‘바퀴벌레’사건 등 라면업계의 제품 이물질 문제는 현재도 끊이지 않고 있는 상황이며 MSG(L-글루타민산나트륨), 미국산쇠고기 사용 등 소비자들의 신뢰문제 역시 끊이지 않고 있다.
라면시장은 거대화, 다양화 되며 나날이 성장하고 있는 추세다. 라면업계가 ‘안전한 먹을거리’를 제공해야 한다는 의무만 잊지 않는다면 몇 십 년 뒤에는 라면이 국민의 먹거리에서 세계의 먹거리가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임해성 기자 hslim@jk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