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이규현 기자] 재정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 국가들의 재정통합이 가시화되고 있다.
유로존 핵심국가인 독일과 프랑스는 재정위기 해결을 위해서는 각 국의 재정을 하나로 통합해 운영해야 한다며 재정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재정통합은 독일이 유럽중앙은행(ECB)의 강력한 시장개입과 유로본드 도입을 거부해온 원칙론을 접을 수 있는 명분이라는 점에서 유로존 위기 극복에 돌파구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일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 역시 유럽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는 열쇠는 재원의 확충이 아닌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유로존을 대표하는 국가인 독일과 프랑스, ECB가 한 목소리로 재정통합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재정통합을 위한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것으로 보인다.
◇ 독일.프랑스 재정통합 공동안 제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2일(이하 현지시간) 의회 연설에서 "우리는 재정통합을 논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재정통합을 창출하기 시작했다"며 "적어도 유로존 국가들에 대해선 엄격한 규정을 지닌 재정통합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재정통합이 가시화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그녀는 "몇달 전만 해도 올 연말에 재정통합에 대해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인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면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을 것"이라며 "그러나 이제 이 문제가 지금 의제에 있다. 물론 넘어야할 어려움들이 있지만 재정통합의 필요성에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고 강조했다.
메르켈 총리는 유로존 재정통합 구상과 관련, 유럽사법재판소(ECJ)가 새로운 `안정 및 성장 협약'을 위반한 회원국들을 처벌할 권한을 가져야 한다며 재판부는 정치적으로 독립된 인사들이 될 것이라고 소개했다.
그녀는 또 시장의 신뢰를 회복시키는 프로그램이 "올 연말까지" 가동되기를 바란다고 언급, 재정통합을 규정한 유로존 별도의 조약 시행 시기를 올 연말로 목표로 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녀는 오는 9일 EU 정상회의에서 EU 차원의 조약 개정 변경을 목표로 하고 있다면서도 안정이 시급한 유로존만의 별도 조약도 "차선"이라고 덧붙였다.
앞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도 전날 프랑스 툴롱에서 지지자들에게 행한 연설을 통해 "프랑스와 독일이 함께 새로운 (유럽의) 미래를 보고 있다"며 재정통합을 밀고나갈 것임을 천명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독일과 프랑스의 분열은 유럽 전체의 분열과 약화를 초래했다"며 위기 해결책 마련에서 드러난 양국의 이견을 인정했다.
그는 "앞으로 유로존 내 어떤 국가의 대출에서 단 1센트도 잃지 않을 것이다. 이는 신뢰의 문제"라며 "이게 바로 프랑스와 독일이 보다 엄격하고, 보다 통합돼 있으며 경제 가버넌스에 의해 보다 책임있는 방향으로 EU 조약을 고치려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사르코지 대통령은 "오는 5일 메르켈 총리와 만날 것이고 유럽의 미래를 보장하는 프랑스-독일 공동의 제안을 내놓을 것"이라고 밝혔다.
독일과 프랑스 정상이 오는 5일 회동해 유로존 재정통합 공동안을 마련한 다음 오는 9일 예정된 EU 정상회담에서 제시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 강제적 규정과 제재 도입
현재 유로존에는 단일통화인 유로화와 단일 중앙은행인 ECB가 존재한다. 그러나 지금의 유로존은 `통화동맹'에 그치고 있으며, 재정정책은 각 회원국에 재량권이 있어 통화정책만을 합치는 ‘반쪽통합’이라는 한계를 보여왔다.
이 때문에 유로존 일부 국가들이 과도한 복지 등으로 인해 방만한 예산을 집행한 결과 재정위기를 겪게 되면서 위기가 모든 유로존으로 확산되고 있다.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이 재정위기로 디폴트(채무불이행) 위험이 높아져 유로화 가치가 폭락하게 되면 전체 유로존의 자산가치가 감소하게 되며, 아울러 재정 불량국들의 국채를 다량으로 보유해 왔던 은행들이 큰 손실을 입게 되면서 금융시장이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을 위험도 크다.
이 때문에 독일과 프랑스는 유로존 전체의 재정을 하나로 관리해 보다 엄격한 재정정책을 집행함으로 더 이상 방만한 재정으로 인해 위기가 재발해 유로존 전체로 확산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현재 EU `안정 및 성장 협약'은 회원국의 재정 적자 상한선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3% 이내, 정부부채 비율 상한선을 GDP 대비 60% 이내로 각각 못박고 있으며, EU에 가입하려면 이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그러나 가입한 이후에는 이 기준을 위반해도 제재할 실효성이 있는 수단이 없으며, 이 허점이 그리스 재정 위기를 배태했다. 그리고 그리스에서 시작된 재정 위기는 포르투갈, 아일랜드 등 주변국에 이어 스페인, 이탈리아, 심지어 프랑스 등 중심국으로까지 번졌다.
이에 따라 각 회원국이 예산을 세우고 집행할 때 EU의 관리감독 권한을 강화하고, 위반하면 제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재정통합의 구상이다.
독일과 프랑스는 우선 유로존 재정통합을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EU 차원의 협약 변경에는 세부안을 마련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고 걸림돌에 부닥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 유로존 위기 극복 돌파구
금융시장에서는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에 이어 프랑스까지 번진 유로존 위기에 근본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으로 ECB의 강력한 시장개입과 유로본드(유럽공동채권) 도입 등을 주장하고 있다.
유로존이 유럽재정안정기금(EFSF)과 국제통화기금(IMF) 재원확충을 병행 추진하고 있지만, 이런 구제금융 수단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ECB의 강력한 시장개입은 이탈리아 등 위험국의 국채를 시장에서 무제한 사들이거나 대규모 양적 완화를 통해 자금을 푸는 방안 등을 뜻한다. 또한 ECB가 IMF에 대출을 제공해 위험국을 우회 지원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유로본드 발행은 위험국들이 국가신용등급이 우량한 일부 회원국들의 신용을 빌려 자금을 조달한다는 의미다. 신용등급이 우량한 회원국들이 위험국들이 부담해야 할 이자를 일부 부담하는 셈이다. 그러나 독일 정부는 지금까지 이런 구상들에 대해 재정 적자를 화폐 증발로 해결하는 방안이라며 거부해왔다.
특히 독일이 유로본드에 반대하고 있는 이유는 유로본드 도입을 통해 재정 불량국들과 함께 국채를 발행하게 되면 독일의 국채 발행금리가 지금보다 더욱 오를 가능성이 높아져 독일 국채가격이 하락하게 되기 때문이며, 과거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 경험한 하이퍼 인플레이션의 악몽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에 따라 메르켈 정부로서는 유로존 붕괴 우려까지 낳고 있는 시급성을 고려해 기존의 원칙론을 접을 명분이 필요한 상황이다. 자금을 지원해준 국가들의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를 막는 유로존 재정통합이 독일 정부에 괜찮은 명분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형성돼 있다.
유로본드 발행에 시장에서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만약 재정통합이 이뤄진다 하더라도 실질적으로 통합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회원국 모두가 공동으로 발행하는 단일채권, 즉 유로본드가 도입되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유로본드를 통해 회원국 모두가 공동으로 채무를 부담하는 체제를 갖추지 않은 채 단순히 재정정책의 강제성만 부여할 경우 각 회원국 내부의 강한 반발이 나올 가능성이 클 뿐 아니라 개별 국가들이 서로 다른 금리로 채권을 발행해 자금조달 능력의 차이가 커지면 통합된 재정정책을 효율적으로 시행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전날 유로존 재정통합을 전제로 ECB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이에 따라 유로존 재정통합이 완성되는 것과 함께 재정 위기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 마련도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메르켈 총리는 이런 기대감을 의식한 듯 유로존 재정 위기에 대한 독일 정부의 접근을 마라톤에 비유하고, "재정 위기 해결은 일련의 과정이라며 이 과정은 수년이 걸릴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녀는 또 "ECB 임무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나 영국 중앙은행(BOE)과 다르다"고 선을 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