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이달 초 ‘대국민 사과’를 하고 3주간의 장기간 유럽·일본 출장을 다녀왔고, 최근 들어서는 소송에 침묵을 지키고 있다.
중국에서 돌아와 입장 표명에 나설 것으로 점쳐지던 이맹희씨의 귀국은 무기한 연기됐다.
거친 입씨름의 선공은 이건희 회장이 했지만, 여기에 불을 붙인 건 이맹희씨였다. 이맹희씨 쪽은 여론이 유리하게 흐르고 있다고 보고, 중국에 체류중인 이맹희씨의 입국을 추진해왔다. 해마다 받아온 건강검진을 위해 들어온다는 계획은 그러나 이맹희씨의 아들 이재현씨가 회장인 CJ그룹이 만류하면서 연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재계에선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의 부정적 분위기가 전달되면서 양쪽의 태도가 변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재계 인사는 “정부 고위 관계자가 ‘경제가 안 그래도 나쁜데 재벌들의 집안싸움은 보기에 안 좋고 경제에도 도움이 안 된다’는 뜻을 양쪽에 전달했다”고 말했다.
또다른 재계 관계자는 “삼성가의 상속재산 소송 문제와 막말 공방이 최대 이슈로 떠오르면서 (정부가 주도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 효과 등 주요 이슈들이 묻혀버린다는 힐난이 청와대에서 나왔다”며 “신속히, 조용히 (소송을) 해결하라는 요구가 양쪽에 들어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여론 악화도 양쪽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특히 삼성그룹은 미국 <뉴욕 타임스> 등 외국 언론들까지 ‘막장 드라마’(soap drama)라고 비판하고 나서면서 이미지 실추를 겪었다.
삼성그룹 쪽은 입싸움에 휘말려 봐야 이익이 될 게 전혀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이 회장의 개인 소송이지만 여론이 상당히 좋지 않다는 내부 보고가 있었다”며 “이 회장 스스로도 신문 기사 등을 통해 부정적인 여론을 알고 있었다”고 전했다.
30일 첫 변론기일을 시작으로 양쪽의 소송전은 본격화한다.
지금까지의 여론전에 더해, 이제부터는 법률 공방이 치열하게 이뤄질 전망이다. 가장 주요한 쟁점은 상속회복청구권의 제척기간이 완료됐는지 여부다. 민법 999조 2항은 “상속회복청구권은 그 침해를 안 날로부터 3년, 상속권의 침해행위가 있은 날로부터 10년을 경과하면 소멸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남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81)과 셋째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70)이 한 치의 양보 없이 맞서온 터라 법정에서도 치열한 공방이 예상된다.
이번 재판은 소송가액이 클 뿐 아니라 삼성그룹의 경영권 구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그만큼 재계의 관심이 집중돼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 32부(서창원 부장판사)는 이 전 회장이 제기한 주식인도 청구 소송 첫 변론기일을 30일 연다.
소송의 쟁점은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한인 ‘제척기간’이다. 제척기간은 자신의 권리가 침해된 것을 안 날부터 3년 또는 권리가 침해된 날부터 10년이다. 이병철 회장이 1987년 별세했기 때문에 10년 제척기간은 지났다. 남은 관건은 이맹희 전 회장 측에서 차명주식 문제를 안 이후 3년이 지났느냐다.
이건희 회장 측은 삼성 비자금 특검팀이 2008년 4월17일 수사결과 발표 당시 삼성생명과 삼성전자의 차명주식을 언급했기 때문에 침해사실을 안 날부터 3년이 지났다는 입장이다. 반면 이맹희 전 회장 측은 지난해 6월 이건희 회장 측에서 ‘상속재산 분할관련 소명’과 ‘차명재산에 대한 공동상속인들의 권리 존부’ 문서를 전달받을 때까지는 차명주식의 존재를 몰랐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 측에서 분쟁의 대상이 된 주식 가운데 일부가 선대 회장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이건희 회장이 별도로 구입한 주식이라고 주장한 것도 논쟁거리다. 이는 해당 주식이 모두 상속재산이라는 ‘삼성 특검’의 수사결과에 반하는 것이어서 이렇게 주장한 배경에 이목이 쏠린다. 재판에서 이건희 회장 측이 생전에 증여받은 것이라고 주장할 가능성도 있다. 재판부가 생전 증여를 인정할 경우 사후 상속을 전제로 한 상속회복청구권은 성립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소송을 낸 사람은 이맹희 전 회장과 이건희 회장의 누나인 이숙희씨, 조카인 이재찬 전 새한미디어 사장의 부인 최선희씨다. 현재 소송가액은 1조원이 조금 넘는다. 하지만 소송을 확장할 여지가 있다. 1998년 제3자 명의로 신탁됐다 에버랜드로 편입된 삼성생명 주식 3447만주가 대상이다. 이들 주식까지 포함하면 이번 소송가액은 3조원대에 육박할 것으로 법조계는 보고 있다.
소송을 앞두고 양측은 치열한 신경전을 벌였다. 대표적인 것이 미행사건이다. 지난 2월21일 삼성물산 감사팀 직원이 이맹희 전 회장의 아들인 이재현 CJ 회장을 미행하다 발각됐다. 경찰 발표에 따르면 이재현 회장 미행사건에는 삼성물산 감사팀, 삼성전자와 삼성전기 소속 감사팀 직원이 가담했다. 4명이 2명씩 한 조를 이뤄 미행을 했고 대포폰까지 사용했다.
해묵은 감정이 섞인 막말도 오갔다. 이건희 회장이 “(재산을)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하자 이맹희 전 회장은 “어린애 같은 발언이며 건희는 형제지간 불화만 가중시키고 자기 욕심만 챙겼다”고 비난했다. 이건희 회장은 다시 “누구도 (이맹희 전 회장을) 장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 퇴출된 양반”이라며 맞받아쳤다.
그러나 한 달 전부터 싸움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건희 회장은 대국민 사과를 한 뒤 3주간 유럽·일본 출장을 다녀왔다. 중국에서 돌아와 입장 표명에 나설 것이라던 이맹희 전 회장의 귀국도 무기한 연기됐다.
이건희 회장 쪽은 1987년 이병철 회장 사망 때 상속이 모두 마무리됐다는 입장이다. 또한 상속권 침해가 있었다 해도, 2008년 4월 삼성 비자금 특검이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 이미 차명주식의 존재를 이맹희씨 등도 인지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침해 인지 시점이든 침해 행위 시점이든 모두 지났다는 것이다.
반면 이맹희씨 등은, 상속권의 침해행위는 2008년 말 차명주식을 이건희 회장이 실명 전환할 때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아울러 이맹희씨 쪽은 상속권 침해를 안 날도, 지난해 6월 이건희 회장이 씨제이 등에 ‘선대 회장의 재산은 상속 당시 분할이 결정됐고, 모든 상속인은 다른 상속재산에 대해 어떤 이의도 없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국세청에 제출해 달라는 요청을 보내왔을 때라고 주장하고 있다.
삼성전자 차명주식을 둘러싼 논쟁도 가열될 전망이다. 이건희 회장 쪽은 “선대 회장이 물려준 삼성전자 주식은 이미 처분했고, 차명주식은 이건희 회장이 별도로 사둔 주식”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맹희씨 쪽은 “선대 회장에게 물려받은 주식을 팔고 새로 주식을 구입했다 해도, 주식 구입 자금의 뿌리는 선대 회장의 유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