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경일보 오진희 기자] 글로벌 `애그플레이션'이 안정세를 보이고 있는 국내 물가에 짙은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나라는 밀과 옥수수 수요의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글로벌 애그플레이션이 머잖아 국내 먹거리 물가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애그플레이션은 농업을 뜻하는 `애그리컬처(agriculture)'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성한 단어로, 곡물가격 상승의 영향으로 물가 전반이 오르는 현상을 가리킨다.
또한 물가가 다시 오를 경우 가계 구매력이 떨어지고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낮출 수 있는 여지가 작아지는 등 부작용이 만만찮아 보인다.
29일 국제금융센터 집계에 따르면, 시카고상품거래소(CBOT)의 옥수수 선물 가격은 지난 26일 현재 부셸당 7.81달러로 지난해 7월29일의 6.65달러에 비해 17.4% 올랐다. 소맥 가격도 현재 부셸당 8.84달러로 지난해 7월29일의 6.72달러보다 31.5% 급등했다.
옥수수 가격은 최근 1년 중 저점인 지난 6월1일의 부셸당 5.51달러에 비해 41.7% 올랐고, 밀은 지난해 12월9일의 5.73달러보다 54.2%나 뛰었다.
간헐적인 강우로 곡물 파동의 우려가 다소 잦아들었음에도 미 농무부(USDA)는 올해 미국의 식품 물가가 2.5∼3.5% 오르고
내년에는 3∼4%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다. 미국 정부의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가 2%인 점을 고려하면 높은 수준이다.
다른 주요 곡창지대인 발칸반도와 구(舊) 소련의 북서부와 서부, 동부지역에도 이상 기후로 작황이 나빠졌다.
국제곡물시장에서 현재 옥수수와 대두 가격은 에탄올 등 바이오 연료에 대한 수요와 국제투기자본의 활동에 따라 가격이 급등했던 2008년 곡물가격 급등 시기의 고점을 뛰어넘으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두 곡물의 가격이 이처럼 많이 오른 것은 밀과 옥수수 주 산지인 미국에서 이상기후로 인해 50년(반세기)만의 최악의 가뭄과 무더위가 닥치면서 생산량이 큰 폭으로 줄어들어 공급이 부족해진 것이 주원인이다. 특히 세계 최대 옥수수 생산지인 미국 중서부 지역은 가뭄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밀과 옥수수의 국내 자급률은 2% 안팎으로 우리나라는 두 곡물 수요의 거의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어 글로벌 밀과 옥수수 가격의 급등은 고스란히 국내 식품과 사료 물가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국제곡물가격 변동은 수입 곡물 관련 상품의 국내 물가에 4∼7개월 정도의 시차를 두고 반영돼 올해 3분기 국제곡물가격이 올해 말과 내년 1분기 국내 물가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올해 말과 내년 1분기 제분가격은 올해 2분기보다 27.5%가량 뛸 것으로 전망된다. 두부는 10.3%, 전분은 13.9%, 식물성 유지는 10.6%, 사료는 8.8% 각각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 곡물가격 급변동은 국내 물가뿐 아니라 경기침체가 가시화하는 상황에서 거시경제 전반을 위협할 수 있다.
먹을거리 물가 부담이 가중되면 서민 생활 안정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통화 당국이 추가로 기준금리를 내릴 가능성이 작아져 통화정책의 여력이 줄어든다. 경기하강 국면에서 쓸 수 있는 가장 큰 정책 중 하나인 통화정책이 `애그플레이션'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는 뜻이다.
미
래에셋증권의 김지원 애널리스트는 "7월 들어 중국, 브라질, 한국이 경기부양을 위해 금리 인하를 단행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물가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곡물가격 상승세가 이어지면 물가 부담으로 추가 금리 인하를 단행할 여력이 제한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흐르자 정부는 올해 말 끝나는 수입 밀에 대한 무관세 적용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과, 공공비축 대상 작물을 쌀에서 밀ㆍ콩ㆍ옥수수까지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국제곡물가격 급등으로 피해를 보는 곡물 가공ㆍ사료업체들에 대한 재정지원과 무역금융 및 보증 지원 확대도 추진할 방침이다.
하지만 2008년에는 곡물가격이 큰 폭으로 오르다가 리먼 브러더스 붕괴 이후 닥친 금융위기가 가격 급등세에 `소방수 역할'을 했지만, 이번에는 계속되는 이상 기후와 재고 부족 등으로 가격을 떨어뜨릴 만한 요인이 별로 없는 게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여기에다 중국이 머잖아 농산물 수출국에서 수입국으로 바뀌어 국제농산물 가격을 압박할 가능성이 커 중장기 대비책을 세워야 한다는 지적이다.
정부 당국자는 "2008년 애그플레이션이 닥쳤을 때보다 이번에는 곡물가격의 고공행진이 훨씬 오래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내년에도 이런 가격 급등세가 이어질 것으로 우려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