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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이란은행 계좌 이용해 1조대 위장거래 정황 포착

[재경일보 이형석 기자] 검찰이 기업은행에 개설된 이란중앙은행(CBI)의 원화결제계좌에서 위장거래로 거액이 빠져나간 정황을 포착하고서 수사에 나섰다.

미국의 대이란 제재에서 예외를 인정받아온 원화결제시스템마저 제재 대상에 포함되면 이란산 원유 수입과 국내 업체들의 수출에 심각한 악영향이 우려돼 파문이 예상된다.

특히 미국 당국이 이란 위장 거래 의혹을 별도로 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져 불법 혐의가 드러나면 기업은행 등에 대한 제재가 이루어질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서울중앙지검 외사부(이성희 부장검사)는 최근 국내 무역업체 A사가 기업은행에 개설된 이란중앙은행 명의 계좌에서 1조원 이상을 위장 거래를 통해 해외 5~6개국으로 분산 송금한 정황을 포착, 수사에 착수했다고 14일 밝혔다.

A사는 두바이산 대리석을 수입해 이란에 신전을 건축하는 용도로 수출하는 방식의 중계무역을 하겠다고 관계당국에 신고한 뒤 지난해 2~7월 50여 차례에 걸쳐 기업은행 서울 모 지점에 개설된 이란중앙은행 명의의 대금 결제 계좌에서 1조900억원을 인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돈은 기업은행의 다른 계좌로 이체됐다가 곧바로 해외 5~6개국 계좌로 송금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자체 첩보를 입수, A사가 실제 현물이 오가지 않고 위장거래로 자금을 빼돌렸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거래내역을 확인 중이다.

검찰은 수출입 업체의 외환거래와 관련, 통상 은행이 신용이 불투명한 업체의 외환거래는 꼼꼼히 확인하지만 신용도가 있는 회사의 경우 서류 위주로만 심사하고 물품 거래를 제대로 살피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A사가 악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외국환거래법 및 금융실명제법 위반 등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보고 대리석 중계무역과 관련해 물품 거래가 실제로 있었는지, 기업은행이 외환 거래에 수반된 현물 이동을 제대로 확인했는지 파악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A사 대표인 재미교포 J씨가 두바이에 A사 사무소를 내고 브로커를 동원해 위장 거래를 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다. 검찰은 A사가 페이퍼컴퍼니(서류상 회사)로 의심되지만 아직 단정하지는 않고 있다. 은행권 일각에서는 J씨가 무역 대금 가운데 수수료 명목으로 약 2천만 달러가량을 챙겨 미국으로 송금하려다가 관계 당국에 적발됐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검찰은 A사의 송금 내역과 실제 무역거래 여부 등을 확인하기 위해 금융거래 조회를 위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한국은행에서 관련 자료를 제출받았다.

다른 나라의 생산품을 또 다른 국가에 판매하는 중계무역은 수출입거래로 계상돼 처리되기 때문에 검찰은 한은에 보고된 무역수지 자료를 토대로 A사 거래의 이상 유무를 확인 중이다.

검찰이 받은 자료에는 A사의 무역허가 및 신고과정에 필요한 서류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기업은행 측의 공모 여부와 정부 승인 과정의 문제점도 살펴보는 것으로 전해졌다.

기업은행에 개설된 계좌는 한국과 이란의 교역을 위한 원화결제시스템으로, 미국의 대이란제재법에 저촉되지 않도록 만들어졌다. 현재는 이 계좌에서 중계무역은 허용되지 않고 있다.

검찰은 이란이 미국의 금융거래 제재를 피하기 위해 한국을 자금경유지로 이용했을 가능성도 열어 두고 있다.

문제의 돈이 세탁 과정을 거쳐 무기 수입 등에 사용된 것으로 드러나면 미국의 제재는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올해 들어서만 영국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와 HSBC은행, 이탈리아 최대은행인 유니크레디트그룹 등이 이란과 불법거래를 한 혐의로 미국 검찰과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았다.

최근에는 영국계 SC은행이 이란 법인들과 10년간 거래해온 혐의로 미국 금융당국의 조사를 받고서 3억4000만달러(약 3800억원)의 벌금을 물게 됐다.

미국은 기업은행을 통한 이번 거래도 조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주한 미 대사관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이란의 불법 거래 소문은 연초부터 나돌았다. 미국이 다양한 채널을 활용해 진위 파악을 하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자금 거래 때 기재부의 별도 승인 절차는 없다. 자금세탁이나 위법 사실은 검찰이 판단해야 할 몫이다. 미국 대사관 등에서 연락 온 사실은 아직 없다"고 말했다.

기업은행 고위 관계자도 "미국이 조사에 나섰는지는 모른다. 확인된 바 없다"고 전했다.

기업은행은 위장 거래 과정을 지원하는 등 어떠한 공모도 없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번 중계무역은 이란 은행의 지급확인서 등 서류를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에 돈을 내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편, 한국과 이란이 수출입대금을 원화로 결제하는 시스템을 구축한 것은 2010년이다. 미국이 이란의 핵무기 개발을 막는다며 이란과의 달러 결제를 막자 우회 결제 차원에서 시스템을 마련했다.

이 시스템은 이란에서 원유를 들여올 때 수입대금을 우리은행과 기업은행의 CBI 주 계좌(main account)에 넣으면 대이란 수출업체가 수출 대금을 CBI 자(子)계좌(sub account)에서 빼가는 형식으로 운영됐다.

산업계와 금융권에서는 두 은행 계좌에 약 5조원이 들어가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